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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미국 서부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 95 에는 오렌지를 따고, 이밖에 포도넝굴을 자르고, 포 도순 치는 일, 김매는 일 등 사시사철 일감이 끊이 지 않았다. 그래서 쿠카몽가는 캘리포니아지역의 한인들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벌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 이곳의 과일농장에는 늘 적지 않은 한인들이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단체 1920년대부터 로스앤젤레스에는 북미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여러 한인단체들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대한인 국민회를 비롯하여 흥사단, 동지회, 구제회 등 수많 은 단체가 있었다. 1905년 4월에 북미에서 설립된 공립협회에서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16명의 한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1906년 3월 1일 로스앤 젤레스지방회를 인준하였다. 공립협회 로스앤젤레 스지방회의 초대 회장은 장원근, 서기는 김영일 등 이 선출되었다. 1909년 2월 1일 북미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가 성 립되었고, 1910년 2월 대동보국회까지 합쳐서 ‘대 한인국민회’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와 더불어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된 한인단체로는 흥사단이 있다. 흥사단은 1913년 5 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를 비 롯하여 25명이 참석하여 창단되었다. 흥사단은 일 반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심을 닦는다 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서 흥사단이 창단된 직후인 1913년 7월 흥사단 임 시이사부 사무소를 로스앤젤레스 벙커힐(Bunker Hill)의 한인장로교회 2층에 두었다. 1914년 6월 샌 프란시스코에 있던 흥사단 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고, 그해 9월에는 흥사단 임시이사부를 로스앤 젤레스 웨스트 4번가(W. 4th Street) 1411번지로 이전하였다. 그후 1915년 흥사단 단소를 노스 피게 로아(North Figueroa) 106번지에 두었다가, 1929 년 11월 사우스 카탈리나(South Catalina Avenue) 3421번지로 이전하였다. 미주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와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 축을 이루는 단체는 동지회였다. 동지회는 이 승만을 중심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그의 지도노 선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다. 동 지회 나성지방회도 설치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 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미 각 지방 동지회는 역량 을 결집해 통일된 행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942 년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북미동지대표회를 개최 하고, 여기서 ‘북미동지회총지부’로 명명한 통합체 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그 밑에 의사부와 행정부를 두기로 하였다. 북미동지회총지부는 1943년 4월 나성지방회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동지회 회관을 매입함으로써 각 지부를 결속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었다. 북미 지역에서 동지회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자, 기존의 북미동지회총지부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로 명 칭을 바꾸게 되었다. 1943년 9월경 뉴욕에서 발행 하던 『북미시보』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고 이범녕 을 주필로 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그리고 뉴욕에 있 던 북미동지회 총지부를 동지회북미총회로 옮기고, 총회장에는 이살음, 부회장에 김종림을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