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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일어나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성공과 실패는 비록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몸을 내놓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받쳤으니 평소에 예언하던 것과 대조회 볼 때에 증명서를 놓고 맞추어 보는 것처럼 틀림이 없었으며 마음에 지녔던 것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문관 전쟁을 담당해야 할 의무도 없으며 선생은 또 당시에는 아무런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고 다만 정의에 입각하여 일어난 것 뿐이었다. 가령 어떤사람의 주장과 같이 군대를 정비하고 정세를 관망하면서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지라도 누가 잘못이라 하였으리오마는 마침내 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강력한 적을 대항하여 죽으면서도 후퇴함이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묘년에 일본에서 사신이 왔을떄에 선생은 즉시 글월을 올리어 '그 사진의 목을 베어서 중국에 보고해야 된다'고 주장할 때에 그 시퍼런 의기와 강경한 어조가 바로 태양과 빛을 다툴 수 있었으니 호전이 송나라 황제에게 올렸던 격렬한 정의의 글월을 선생의 상소문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선생은 또한 천문에 정통하였다. 어느날 동쪽에서 무슨 소리가 천둥하는 것처럼 울랴나왔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은 천고라는 것이니 왜놈의 무리들이 지금쯤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 맞아들어 갔는데 날짜도 틀리지 않았다. 이것만 보다라도 선생은 과연 특이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역적인 정(鄭)가를 배격하는 상소에서 그를 예와 한착에게 비유했었는데 후일의 결과는 불로 비쳐보는 듯 점을 치는 듯이 들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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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밖에도 기록으로 남겨 야 할 위대하며 빛나는 행적이 많지마는 그가 충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가장 중대한 사실에 대하여는 미처 예언하자 못했던 것이라 하겠다. 선생의 8대조는 이름이 천주다 홍건적의 난리를 당하여 박주에서 두번이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안주싸움에서 패하여 목숨을 바쳤다. 선생은 이 사실에 대하여 늘 무릎을 치면서 그를 추모하 여 그의 애기하기를 즐겨하더니 이제 마침내 그와 같은 역사를 밟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로다. 선생의 이름은 헌 자는 여식 중봉은 호다. 정묘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처자가 굶구림을 면치 못하였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데는 맛있는 음식이 떨어진 적이 없었고 자신이 농사를 지어서 생활을 영위하며 여가가 있으면 곧 성현의 책을 펴 놓고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야말로 옛말에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 글 읽는다'는 사람이었다. 그가 공부한 학설에 대하여는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내려 하였고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신념이 평소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도 뚜렷이 이와 같은 절의를 세웠으니 존경할만하도다. 피난 중에 계시는 임금께서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듣고 교서를 내리어 봉상시 첨정을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이튿날 선생의 아우 범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들어갔다. 선생은 깃발 아래에 죽어있고 장수와 군대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범은 선생의 시체를 등에 업고 옥천으로 돌아가서 나흘만에 빈소를 차리었는데 얼굴빛이 살아있는듯 하였고 성낸 기색이 시퍼랬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일어선 채 그대로이어서 사람들은 그의 죽은지가 벌써 오래되었음을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을 따라서 싸우다가 죽은 7백명은 대채로 모두들 선생의 열렬한 의기를 사모하였으며 보고 듣는 동안에 감화하며 충격을 받은 사람들로서 생명을 바치는데 있어서 오히려 남에게 뒤떨어질까 염려하여 군대 전체가 모두 충의를 다한 귀신이 되면서 까지 회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번 전쟁이 일어난 이래 다른 군대에서 볼 수 없었던 사실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서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