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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태어나니 총명하고 단아한 용모와 분명한 행의는 장차 큰일을 해낼 인물이라고 하였다.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여는 백형 휘 준 문파공께서 비분강개하여 簡昜(간양)학교를 세워 민족혼을 일깨우고 안희제 공과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거금의 독립자금을 조달하며 옥고를 겪고 있을 때 공은 조국독립을 위하여 한 몸을 던졌으니 충신의 가문에서 충절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알겠도다. 공은 약관에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이시열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80여인의 동지들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왜경에게 쫓기던 신성모 김효석 등을 교촌의 공의 집에 숨겨두었으나 일제의 수색이 좁혀지자 백형이 장만해 준 자금과 공의 상속분 중 백석지기 전답을 팔아 거액을 마련하여 중국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하였으며 광복 후 두 분은 정부요직을 역임하였다. 공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재무위원으로 선임되고 임시정부 조사위원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 중 중요한 임무를 띠고 고국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1927년 정월 3일 대구에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으니 애석하도다. 조국의 명운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은대 큰 뜻을 다 펴지 못하고 가셨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묘는 경주천 북동산 증조 비 영하이다. 광복 후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을 수여하고 1990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배는 여강 이씨 능렬공의 따님으로 부덕과 부공을 겸비하였으며 1950년에 하세하니 향년 63세라. 부군과 함께 하지 못한 광복의 기쁨을 눈물로 여한을 달랬다고 한다. 묘는 합폄이며 1남 1녀를 두니 남은 림이요 여는 주이며 서는 조성직이다. 손자는 성환이요 손녀 경의 부는 김영제요 호정의 부는 권혜안이요, 옥혜의 부는 이병천이며 휘옥은 미가이다. 증손녀는 승희 미혜이며 외손은 조만희 조중희이다. 계미 국추에 공의 사손 성환보가 사료를 간추려 양을 찾아와 공의 묘표를 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