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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선생은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 등의 청년회 간부 및 박영하와 그의 집에서 몇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이종욱·이문조·박영하 등과 함께 그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동리·남외리·산전리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이종욱·이종룡(李鍾龍) 등 14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이문조·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곽남부락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최현구(崔鉉久)·황정달(黃丁達)·백봉근(白鳳根)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다음날의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이튿날 오후 3시경,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주재소 앞에서 모여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을 무렵, 울산으로부터 13명의 일본 군경 응원 출동하여 이문조 등 9명의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이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칼을 든 일본 군경에게 달려들자, 일본군 수비병이 발포를 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일본군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