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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탐방지 이동중에 애국지사 원종응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만났다. 이곳의 GPS상 주소는 신니면 화석리 724-3이다. 1932년 5월 충남 대전에서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과 비밀결사 적색소년동맹(赤色少年同盟)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원종응은 용원공립보통학교(龍院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고학당(苦學堂)에서 2년간 재학하다가 중도 퇴학하였다. 이후 원종응은 1932년 1월경부터 4, 5개월간 잡지 지사를 경영하고, 그해 5월 1일 충남 대전군(大田郡) 외남면(外南面) 고산사(高山寺)의 뒷산에서 정창세(鄭昌世)·유의영(柳義永)·강창기(姜昌基)·이병주(李炳周) 등과 함께 충남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원종응은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유의영은 조직부, 이병주는 재정부를 각각 담당하였다. 이후 원종응을 비롯한 동맹원들은 몇 차례 모임을 갖고, 동지획득에 힘썼다. 그런데 충남전위동맹은 6월 1일 대전전위동맹(大田前衛同盟)으로 개칭되고, 6월 중순경에 해산되었다. 한편 원종응은 대전전위동맹 외에도 비밀결사 단체인 적색소년동맹(赤色少年同盟)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적색소년동맹 또한 대전전위동맹 해산시기와 비슷한 무렵에 해산하였다. 이후 원종응은 1935년 7월경에 대전중학교(大田中學校) 학생반(學生班) 및 무수리(無愁里) 농민독서회(農民讀書會)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輪讀)하는 등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11월경 원종응은 대전군 시제사공장(是製 工場)에서 동맹파업을 전개하자 이를 격려하는 내용의 격문을 인쇄,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원종응은 일본 경찰에게 피체되어 1934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그후 묘소를 찾으려 조사하는 과정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것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