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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安圭洪)의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1879년 4월 10일 전남 보성군(寶城郡)에서 안달환(安達煥)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구국의 함성이 높아가자 거의할 목적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였다. 한편 주인에게 모일(某日)에 논일을 할 터이니 일군들을 대접할 준비를 해 달라고 알린 연후에 은밀히 담살이 동지들 수십 명을 규합하였다. 거사일이 되어 동지를 모으고 주인에게 몰려가 국사를 도모하고자 하나 우리에게 재물이 없으니 군사물자를 조달해 줄 것을 강청하여 군량과 자금을 받아 냈다. 그리고 일찍이 은밀하게 밀약 받았던 동리의 참봉 안 극(參奉 安 極)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1908년 2월 관북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여 병력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을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강성인은 본래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여 민폐가 컸다. 안규홍이 다스리고자 하나 고쳐지지 않자 할 수 없이 그를 포박하여 죄상을 밝힌 후 참형에 처하였다. 이로써 군기는 바로 잡히게 되었다. 그후 농군을 소모(召募)하여 대오(隊伍)를 정비한 후 안규홍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부 장 염재보(廉在輔) 참 모 장 송기휴(宋基休) 선 봉 이관회(李貫會) 좌우익부장 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瑁)·송경회(宋敬會)·손덕호(孫德浩) 유 격 장 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 좌우부참모 오주일(吳周一)·나창운(羅昌運) 서 기 임정현(任淨鉉) 군 수 장 박제현(朴濟鉉) 안규홍은 비록 배우지 못하여 문자를 몰랐으나 천성이 뛰어나고 결백하며 과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농민군이 그를 따랐다. 이들 안 담살이 의진이 보성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병들이 보성군 조성(鳥城)·벌교(伐橋)·순천(順天)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포위 섬멸전을 전개하려 하였다.안규홍은 평소 초로 지리(樵路地理)에 밝은지라 일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적이 정시(定時)에 출동하여 수색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보성 동쪽 8키로미터 떨어진 파청(巴靑)의 험한 지점에 복병을 마련해 두었다. 마침 일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미도(永戶)·히라이(平井)의 두 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복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적병 부대장들이 쓰러지고, 전군이 궤멸하여 의병 부대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후 다시 대원산(大院山)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파청대첩(巴靑大捷)이다. 이후 일군은 안규홍의 부대를 의병 부대 중 최강의 부대로 지목하게 되었다. 파청대첩 후 적의 신예 부대(新銳部隊)는 보복전을 펼쳐 대원산 사찰을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의병은 사찰 문루와 장벽에 의지하여 분전한 끝에 여유 있게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복(同福)을 탈환하기 위해 운월치(雲月峙)로 진군하다가 누봉산(樓鳳山)에서 적과 부딪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특히 참모 나창운(羅昌運)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보았다. 이에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한 후 1908년 8월 24일 진산(眞山)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군 5명을 중상시키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진산대첩(眞山大捷)이다. 그후 안규홍의 의병 부대는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공격 태세를 갖추어 1909년 3월 25일 원봉(圓峰)의 적병을 기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때 규홍은 소병력을 한산한 곳으로 보내어 약탈을 가장하는 등 적의 눈을 속이고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원봉 기병 주둔소를 야습하는 작전을 썼다. 일군 대장 도변(渡邊)은 말을 타고 도주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다량의 무기와 화약·군량을 획득하였으므로 의병 부대를 재편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시 순천(順天)으로 가서 일군 대부대를 습격하였다. 처음에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안택환(安宅煥)·임정현(任淨鉉) 등이 전사하였다. 이어 송기휴(宋基休)를 유격장으로 임명하고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일병 증원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 당하였다. 안규홍은 의병을 상인·농민 등으로 가장시켜서 포위망을 탈출하여 바닷가에 집결시켰다. 다시 밤에 배를 타고 고흥(高興)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수는 줄고 무기도 빈약하여져서 정면충돌을 감행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에 작전을 바꿔 유격·기습 작전으로 성과를 거두며 전전하다가 송기휴가 전사하게 되었다. 이에 거점을 장흥 백사(白沙)로 옮긴 안규홍은 전세가 불리하게 된 연유를 규명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일진회(一進會)의 밀고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자 그들을 색출하여 시장에서 공개 총살시켰다. 그리고 일인 첩보대장 탄시(灘市)를 사살하고 8월에는 270명의 의병을 총동원시켜 순천군 낙서면 상우리(洛西面 上右里) 소재 일진회를 습격하여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고 9월 25일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았다. 한편 1909년 5월 이후 함평(咸平)의 심남일(沈南一)과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수차례의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보성·순천·흥양·여수·돌산·광양·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재개하였다. 적은 부석(富石)대위를 중심으로 토벌대를 구성하는 한편 의병의 가족들을 동원시켜 각종의 귀순 공작을 전개하였다. 토벌대의 대병력이 전라도를 북쪽에서부터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남쪽으로 몰아 내려 왔다. 안규홍은 하는 수 없이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9월 25일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鳳德面法化村)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과 함께 부석의 부대와 광주경찰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곧 광주에서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1911년 5월 5일 교수형에 처하여져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그밖에 안규홍의 부하로서 전사·순국한 영웅들이 많다. 해산을 극구 만류하던 임낙균(林洛均)부자는 흑석산(黑石山)에서의 전투 중에 모두 전사하였으며 박봉석(朴奉石)·손덕오(孫德五)·염인서(廉仁瑞·廉在輔)·정기찬(鄭奇贊) 등은 1910년에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안규홍의 안담살이 의병 부대는 처음 유생 중심의 의병운동이 점차 대중적 기반을 닦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병운동 전개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대중화 경향은 1908년에서 1909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투쟁은 보다 격렬화 하여갔다. 공간적으로도 처음의 의병운동이 산악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점차 평원지대, 도시, 해안 지대로 확산되어 가는 발전적 면모를 띄며, 작전도 보다 능숙한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게 되어간다. 그리고 참봉 안 극과의 관계나, 심남일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듯이 양반 유생들과의 관계가 초기 의병운동에서보다 원만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장기적·전국적 투쟁에 있어서 대중적 기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전술상 그리고 실제 전투에 있어서의 탁월한 능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분을 초월한 대등한 관계에서 의병진간의 유대가 맺어졌으며 의병운동의 유기적 전개를 가능하게 한 전제조건이 형성되게 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