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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동남아의 ‘십자로’ 싱가포르에서, 한국독립운동 93 인 신분(李儀景의 중국발음 ‘Yiking Li’으로 된 護照) 으로 프랑스 여객선 르 뽈 르까(Le Paul Lecat)호를 타고 프랑스로 갈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사이공과 인도양을 지나, 홍해를 건너 마침내 프랑 스에 도착했다. 이의경은 1920년 5월 프랑스의 마 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했다. 안봉근의 주선으로 다 시 프랑스에서 리용(Lyon), 디종(Dijon), 뮐하우젠 (Muhlhausen),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를 지나 독일로 가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무역업에 종사한 박재혁 의사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를 폭파한 박재혁(朴載 赫)도 한 때 싱가포르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18년 상하이를 거쳐 싱가포르로 가서 그곳의 남양무역회 사에서 일하다가, 1920년 4월경 상하이로 돌아와 김 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0년 9월 부산 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던져 서장을 부상시키는 의 열투쟁을 감행하였다. 박재혁이 무엇 때문에 싱가포 르에 갔었던 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丁巳, 1917년) 6월 (곡물무역상 - 필자) 주인 에게 청(請)하여 700여 원 자금을 얻어 상하이(上海) 로 들어갔고, 다음해 6월 집으로 돌아와 여러 달을  지내다가 또 상하이 및 싱가포르(新嘉坡)로 가 무역 에 종사하였다. 『기려수필』의 기록을 통해 박재혁 의사가 싱가포 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인삼무역상들이 상하이를 거쳐 싱가포르를 왕 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그도 인삼무역에 종사하였 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 이 인삼무역상점은 단순한 영업점이 아니라 독립운 동의 거점이었고, 박재혁이 싱가포르에서 인삼무역 을 할 당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김원봉 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동휘가 싱가포르에서 당한 위기 1921년 11월 중국 상해 고려공산당 대표회에서 제3차 국제공산당대회 파견대표로 이동휘, 박진순, 홍도 세 명이 결정되었다. 이동휘와 박진순은 유럽 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고, 홍도는 시베리아를 거쳐 서 모스크바에 가게 되었다. 이동휘와 박진순이 유 럽을 거쳐서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자유시참변 이 후 시베리아지역에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동휘의 유럽행에는 독일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이극로가 통역을 맡게 되었다. 그 여정은 이극로가 『조광』에 연재한 「수륙(水陸) 2만리 주유기(周遊記」 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 기록은 훗날 『고투(苦鬪) 40년』에 실렸다. 이를 보면, 1921년 6월 18일 상하 이에서 프랑스 배를 타고, 홍콩·사이공을 거쳐 싱가 포르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일본영사 관 경관 한 명과 영국경관 두 명이 배에 올라 이동휘 와 박진순을 찾았다. 일본과 영국 경관은 두 사람의 선객 여행권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함 장이 시간이 없다면서, 배가 떠나야만 한다고 하여 이동휘와 박진순은 겨우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