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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남강 이승훈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93 다. 또, 부족한 국가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 (當百錢)도 발행했으며, 심지어는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로부터 문세(門稅)도 받았다. 이로써, 경복궁 중건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때,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시폐사조소(時 弊四條疎)가 백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상소 내용은 경복궁 중건 중지, 세금을 걷는 정치 중지, 당 백전의 혁파 및 도성문세의 금지였다. 이에 더하여 1868년(고종 5년) 10월 미사액(未賜額) 서원의 철폐 를 시작으로 하여 1871년에 사액서원 47개 만 남기 고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이에 격분한 지방의 유생들이 서울로 올라와 탄원하였지만, 대원군은 이 에 굴하지 않았다. 이승훈, 근대교육에 눈뜨다 남강은 이러한 시기를 지켜보면서, 여덟 살 때부 터 서당에 나가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세상에 눈떠 갔다. 그러던 중, 남강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었는데, 스물 네 살이 되었을 때 이웃의 도움으로 평안북도 정주의 납청 정(納淸亭)에서 놋그릇 장사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 다. 이 무렵, 남강은 틈틈이 서당 훈장으로부터 한 문 도 배우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알아갔다. 그런 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하여 포교와 교 육을 목적으로 외국의 선교사들이 몰려들면서 배재 학당(培材學堂) · 이화학당(梨花學堂) 등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886년 9월 23일 관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면서 우리 조정에서도 근대교육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1894년(고종 31년) 갑오 개혁에 의해 교육 제도의 일대 개 혁이 이루어지면 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리고, 갑오개혁 을 거치면서 국정 개혁에 있어서 무 엇보다 시급한 것 이 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이었 다. 이러한 필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진 이승훈  흉상(한국교육신문 제공) 설립 초기 배재학당(왼쪽)과 이화학당의 모습(한국학중앙연구원 · 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