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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전개하다 93 멕시코시티의 한인 사업가 한인들은 멕시코시티를 멕시코의 서울이라고 하 여 ‘묵경(墨京)’이라고 불렀다. 1905년 멕시코로 이 민을 간 1,033명의 한인들은 홍일염천(紅日炎天) 가 시밭에서 칼선 지옥과 같은 곳에서 4년 동안 무진 고 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나라 잃은 백성이라, 이 세상 에서 아무도 그들을 구제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가 1909년 5월 12일 유카탄의 한인들은 노동계약에 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자유인이 된 한인들은 대도회로 나왔다. 특히, 멕시코시티로 많은 사람들 이 몰려들었다. 1916년 7월 6일자 『신한민보』에 실 린 「 묵경동포의 영업」 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멕시코 시티에 사는 12명의 한인들은 네 가지 종류의 영업 에 종사했다고 한다. 첫째로 서현우 · 서춘동 · 서온 · 이 종태가 식품점을 하였고, 두번째는 이성로 · 이인 여 · 이순여 · 이경재가 시계수리점, 김동현 · 최창식이 행로상업, 김명환이 이발소를 운영했다.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진 한국인 은 김순권이었다. 김순권은 미국에서 멕시코 탐피코 에 와서 김익주의 딸 마리와 결혼했다. 그는 성실함 으로 1925년에 4,000페소의 자본을 모아 화장품 제 조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많은 파란과 실 패를 경험하였다. 김순권은 그의 부인에게 정신병이 들었다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노력과 인내로 꾸준히 연구하여 사업에 성공했다. 김순권이 제조한 화장품 은 품질이 매우 양호하여 유럽사람이 제조한 화장 품에 뒤지지 않았다. 1929년 김순권의 총수입액은 44,000페소이고, 총자본은 23,000페소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30년 본점을 멕시코시티로 이전하 고, 탐피코에는 지점을 두었다. 본점에는 수십명의 직공들이 물건을 제조하고, 한인 동포들이 대리인이 나 직공으로 근무했다. 멕시코시티의 독립기념비(앙헬탑, 김도형 촬영) 멕시코혁명 기념탑(김도형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