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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5년 9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다. 박용만은 대학에 입학하 기 위해 네브라 스카 카니로 가 서, 그의 숙부 박장현(박병희) 과 함께 철도회 사와 교섭하여 한인들의 일자 리를 주선해 주 고 있었다. 그 리고 이종희·이 희경·김용대 등 유학생들을 링 컨시의 학교에 입학시켰다. 박 용만은 미국으 로 올 때, 이승만의 아들 이봉수와 정순만의 아들 정 양필을 함께 데리고 왔다. 정양필의 원래 이름은 ‘정 충모’였으나 1909년에 개명하였다. 1907년 박용만 은 정양필과 유일한·이관수 등 소년들을 네브라스카 에 데리고 와 ‘스쿨보이(School Boy)’로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박용만은 숙부 박장현과 1906년 여름 콜로라도주 덴버에 자리를 잡았다. 박용만은 콜로라도 예비학교 (Colorado Preparatory School)에 입학하는 한편, 여관과 노동주선소를 운영하였다. 박용만과 그의 동 지들은 1908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덴버에서 북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였다. 북미애국동지 대표회를 마친 박용만은 노동주선소와 여관을 윤병 구에 맡기고, 1908년 가을학기에 네브라스카대학에 입학하였다. 네브라스카대학은 간부후보생(ROTC) 을 양성하는 조건으로 설립된 대학이기 때문에, 학 생들은 반드시 간부후보생 과목을 선택해야만 했다. 박용만은 카니에서 박처후와 임동식을 만나 한인 군사학교 설립에 대해 논의하고 모든 일을 이들 두 사람에게 맡겼다. 박처후와 임동식은 카니시에 농장 을 마련하고 한인 학생들이 기숙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육군이 사용하던 군용총도 마련하였다. 농장을 실제적으로 경영해 본 경험이 있는 조진찬을 초빙하 였다. 1909년 6월 초순 카니시의 한 농장에서 ‘한인 소년병학교’가 설립되었다. 네브라스카 카니의 박처후 등이 장 인환 의거 재판의연금을 보낸 편지 (1908.3.30) 문양목이 쓴 한인소년병학교에 대한 논설(『신한민보』 1910년 6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