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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4년 4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불가합니다. 대가(大駕)가 조선 땅에서 한 걸음이라 도 벗어나면 조선은 이미 우리 땅이 아닙니다.” 한편, 선조의 파천(播遷) 소식이 전해지자 성난 백 성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와 형조(刑曹)와 장예원(掌 隸院)을 불태웠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형조는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곳이며, 장 예원은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곳이다. 이 곳을 불태 운 백성들의 분노를 알만하다. 조정이 이미 백성들 의 신뢰를 잃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순신, 거북선을 앞세우다 이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옥포 해전(玉浦海戰)에 출전하여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 는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반도의 남단(南端) 여수에 자리 잡은 전라좌수영에서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예하 각진(各陣)의 실태를 점검, 군비를 강화했던 것 이 승전의 결과를 가져왔다. 5월 7일, 옥포 해전을 승리로 장 식한 이순신 장군 은 군비를 강화하 는 한편 군기를 바로 잡는 데 힘 썼다. 그리고, 장 병들에 대한 신상 필벌(信賞必罰)을 엄격하게 함으로 써 사기를 진작시 켰다. 이를 위해 시사대회(試射大會-활쏘기대회)를 개최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는 임진왜란에 서 처음으로 거북선(龜船)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수 군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철두 철미한 전략가였다. 신무기를 만들어 적을 무찌르기 로 하고, 조수(潮水)의 밀물 · 썰물을 이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진 해전은 한산도에서였다. 장군은 일본의 수 군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선 70여 척 이 견내량(見乃梁, 지금의 통영)에 정박하고 있다는 적정을 확인하고, 전의(戰意)를 가다듬었다. 삼도수 군통제영 진남관(鎭南館)에서 “나라의 존망이 위기 에 처해 있으니, 이 한 몸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갚 으리라”는 각오를 다진다. 1592년 7월 8일, 격전의 아침이 밝았다. 장군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경복궁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근정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한국민족문화 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