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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학 목사(1877 ~ 1950.9.28) 전남 승주에서 태어나 1923년 46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하동, 순천, 여수 등에서 시무. 일제강저기에는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여러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6.25때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체포되어 여수 둔덕과수원에서 향년 73세에 순교하였다. 허상용 집사(1906.12.25 ~ 1950.9.28) 전남 여수 돌산읍 군내리 출신으로 21세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후 자신의 집옆에 돌산읍교회를 개척하였다. 면사무소에서 부면장으로 근무하면서 6.25 발발로 교인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갔지만 스스로 교회 지킴이를 자임하다가 체포되어 여수 둔덕과수원에서 향년 44세에 순교하였다. 지한영 전도사(1906.5.16 ~ 1950.9.28) 전남 여수 율촌면 조화리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덕충교회, 순천 제일교회의 전도사를 거쳐 율촌면 장척교회에서 강도사로 시무중 6.25때 인민군에 체포되어 여수 둔덕과수원에서 장남 지준철과 함께 총을 맞아 향년 44세에 순교하였다. 지준철 성도(1930.6.10 ~ 1950.9.28) 전남 여수 율촌면 조화리에서 지한영 강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수수산학교 졸업후 모교인 율촌초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면서도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지휘자로 성심을 다 하였다. 지준철 성도 역시 이때 체포되어 여수 둔덕과수원에서 부친과 함께 20세에 순교하였다. 윤형숙 전도사(1898.9.13 ~ 1950.9.28) 전남 여수 화양면 창무리 출신으로 광주수피아여고 2학년 재학중 3.1운동때 일본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팔이 잘리고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두 눈마저 멀어졌으며, 여수에서 전도에 헌신하던 중 6.25때 전도사로 알려져 체포되어 여수 둔덕 과수원에서 향년 52세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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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근 목사(1905.10.14 ~ 1942.12.5) 전남 광양 진월면 오사리 출신으로 순천 매산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에서 법률학 전공했다. 1939년 조선신학대학 졸업후 애양원교회 시무목사직을 손양원목사에게 인계하였으며, 1942년 신사참배 거부한 죄목으로 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중 38세에 순교하였다. 안덕윤 목사(1987 ~ 1950.8.17) 전남 광양 진상면 원당리에서 출생하여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제 대창리교회에서 시무할 때 6.25가 일어나자 사역자로서 영광되게 죽을지 언정 교회를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매일 새벽기도를 이어가다 끝내는 교회 뒤 논으로 끌려가 죽창으로 난자를 단한 끝에 향년 53세에 순교하다. 이기풍 목사(1865.1.25 ~ 1942.6.20) 평양출신으로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로 졸업한 7명중 한사람으로 한국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4년 여수남면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으며,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향년 77세에 순교하였다. 이선용 목사(1908.10.21 ~ 1950.12.9) 평남 개천군 개천면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조선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7년 구례읍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 6.25로 훼손된 교회복구를 위해 순천노회를 가던 중 산길에서 공비들의 총격을 받아 동행 4명과 함께 향년 43세에 순교하였다. 김정복 목사(1882.6. ~ 1950.9.27)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고흥읍교회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여 3년 6개월 옥고를 치렀으며 1946년 소록도교회에 자원, 6.25가 일어나자 뒷산 바위동굴에서 기도중 체포되어 고흥읍경찰서 수감중 경찰서 뒷한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향년 68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