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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석탄광 와이오밍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 91 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1906년 6월 경에 락스 피링스의 한인들이 공립협회 총회에 보고하는 것으 로 보아 이즈음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락 스프링스 공립협회 경찰소가 설치되면서 회관도 이 미 있었고, 락스프링스 경찰소에는 이응목·황국일· 이동화·고금자 등의 회원들이 있었다. 락스프링스 공립협회 회원들은 1906년 5월 25일 「위학생헌의 서(爲學生獻議書)」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총회에 보냈다. 이 「헌의서」에서 락스프링스 회원들은 학비 가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그곳 한 인들이 한 달에 1~2달러씩을 공립협회 학무부에 내 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 「헌의서」 제출자들의 뜻 에 따라, 한인 50여 명이 학생들을 위해 매월 5달러 씩을 내기로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락스프링스의 한인들은 1906년 9월 17일 『공립신보』 발간을 위해 의연금 122달러 를 모아 공립협회로 보냈다. 그리고 석탄광의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동포 간의 상호부조를 하며 열심 히 살았다. 『공립신보』 1906년 10월 7일자 기사에는, 락스프 링스 경찰 황국일이 아들을 낳 았는데, 곧바로 사망하여 동포 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 실렸다. 한인들 간의 평화 롭게 지내기 위한 규칙이 있었 지만, 락스프링스 한인들 가운 데 패류(悖類)가 있어서 동포사 회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락스프 링스 공립협회 경찰소에서는 황국일·이응목 등 15명이 지방회 설립 인허(認許) 청구서를 총회에 제출하여, 1907년 1월 22일 지방 회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2월 23일 락스프링 스 공립협회 지방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 락스프링스 지방회 설립 예식에는 총 락스프링스의 「위학생헌의서(爲學生獻議書, 학생을 위해 바치는 글)」보도 기사 (『공립신보』 1906년 6월 18일자) 락스프링스 석탄광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공립신보』 1906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