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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네브라스카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다 91 들도 일제의 압제하에 있는 한국민들을 동정하여 미 국정부와 의회에 청원서를 올려 한국 독립을 지원하 였다. 네브라스카에 정착한 한인들 1907년 말까지 미국(북미)에 온 한인들은 1,300명 가량 되었는데, 대부분 철도공사와 과일·채소 농장, 서양인 호텔과 가정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 외 대학생이 6명, 주간학생이 70명, 야간학생이 100여 명 가량 되었다. 북미의 한인들은 샌프란시스 코·오클랜드·로스앤젤레스·리버사이드 등 캘리포니 아에 주로 살았다. 1905년 4월 도산 안창호는 한인들의 자치와 국권 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 고, 미주 각지에 공립협회의 지방회를 설립하여 한 인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농장에는 주시옥, 정기환, 조영식 등 많은 한 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네브라스카대학에 도 안정수 등 한인 유학생들이 재학중이었다. 오마 하 농장에 노동을 하는 정기환이 매주 토요일 토론 회를 개최하고 농장 부근에 있는 한인들과 지식 발 달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박용만의 군사양성학교 설립 과정 네브라스카주 카니(Keaney)라는 도시가 있다. 도 시의 이름은 1848년 미국 육군 장교 스테펀 카니 (Stephen W. Kearny)의 부대가 주둔한 곳에서 유래 하였다. 카니에는 1866년 유니온 패시픽 철도가 연 결되고, 1874년 버펄로 카운티(Buffalo County)로 선정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농업을 비롯한 각 종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반 카니시의 농장에도 한인들이 모여들 기 시작하였다. 한말 애국지사로 유명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이 1905년 2월 미국으로 유학을 왔 1909년 카니(Kearney)의 중심지 파노라마(위키피디아 제공) 네브라스카주 연방 상원의원 조지 노리스 (위키피디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