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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다산 정약용의 목민사상 91 치 및 경제사상에 크게 매료되었다. 이로써, 다산이 실 학에 관심을 가지 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3년(정조 7 년) 4월, 다산은 회 시(會試)에 합격하 여 성균관에 들어 가 공부하게 되었 는데, 이 때부터 정 조(正祖)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 발되어 규장각(奎章閣)에서 신진 관료들과 교유하면 서 관료생활을 익혀나갔다. 그러던 중 1794년(정조 18년) 10월, 다산은 정 조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적 성 · 마전 · 연천 · 삭녕 일대를 둘러보면서 지방관리들 의 부정 · 부패와 행정의 난맥상, 그리고 농민들의 궁 핍한 생활상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뒷날 학 문과 공직관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1797년(정조 21년)에는 황해도 곡산 부사로 부임하여 2년 간 재직하였던 것도 한 몫을 했 을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1801년(순조 1년) 신유교옥(辛酉 敎獄) 때 경상도 장기(지금의 영일)에 유배되었는데, 그 해 9월에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 생하면서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져 유배생활을 겪어 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다산을 큰 죄인이라 하여 그 와 말도 붙이지 않았다. 거처할 곳이 없어 동 문 밖 주막 노파의 도움으로 방 한 칸을 빌렸다. 그리고, 1818년(순조 18년)에 18년 간의 긴 유배생활에서 풀 려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 ‘시냇물을 건너듯 처신을 조심하자’는 뜻을 담은 서실(書室) 여유당(與猶堂)을 짓고, 이 곳에 머물면서 학문에 전념, 말년을 조용하 게 보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멀지 않은 운길산에 자리잡은 수종사(水鍾寺)에서 스님과 마주앉아 작설차(雀舌茶) 를 마시면서 학문을 논하며 평화로운 노경을 즐겼 다. 또, 때로는 여유당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며, 시로 써 자신의 심경을 읊기도 하였다. “수종사의 저녁 빛은 찡그린 얼굴 모습 / 눈꽃 핀  나무와 얼음 샘이 초조하게 사람 기다리네 / 고갯마 루 까마귀 날자 그 때야 망채찍 가다듬고 / …… / 백 발의 노인 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만 아프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정약용(1762~1836) 영정(이천 시립월전미술관 제공) 1934~1938년 ‘조선학’ 운동과 정약용 서거 100주 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인보·안재홍 등이 교열에  참여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발행한 정약용 저 서 전집 『여유당전서』(중앙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