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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1882년 부제학참의 경리내무위문사무참의 군국사무참의 교섭통상사무 우정사협변등을 역임 1883년에는 협변교섭통상사무에 피임 동년에 전권부사로 미국에 부임 신식 우편제도를 비롯 만국우편연합제도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적극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1884년에 병조참판으로 피임 동년 4월 20일에는 왕명으로 우정총국을 설립 총변이 되자 주도적인 역활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계획수립과 아울러 우편업무를 근대화시켜 오늘의 체신부가 존속할수 있는 기반을 튼튼하게 닦아 놓은 불멸의 공로자이다. 1884년 11월 17일에 업무를 개시하였고 동년 12월 4일 개국연을 계기로 박영효 김옥균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신정부가 무너지고 선생은 창덕궁 뒤산을 넘어 옥류천 상류에서 청병에 의해 무참히도 살해되니 향년 30세였다. 10년후인 1894년 갑오경장때 총리대신 김홍집등의 상소로 신원되어 관에 복귀되고 1910녀에는 규장각대제학으로 추증 충민이라 시호하였다.
대역죄인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혈손이 있을까닭이 없고 백부 휘 순경에게 출계한 백형 휘 만식의 제2자 휘 생겸을 입양한바 그의 자 응기가 출생하여 영등포역장으로 재직중 6.25동란시 행방불명이 되고 응기의 자가 석호이니 곧 선생의 증손이며 석호의 자 창수가 3세 유아로 자랄뿐이다. 선생이 가신지 90여 4년이라 유택에는 표식하나 없어 아는 이 없기에 후세에 남겨줄 교훈으로서 우리들 교직원및 훈련생 4316명이 성의를 모아 비를 세워 계계승승 뜻있는 만인으로 하여금 향화와 담배를 받으시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