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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5년 10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락스프링스에 몰려온 한인 노동자들 락스프링스에 한인들이 언제부터 왔는지에 대 한 자료는 없다. 1906년 말 북미지역의 한인은 약 1,300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철도공사장, 과실농장, 그리고 광산 등에서 일 을 했다. 그밖에도 서양인들이 경영하는 호텔과 사 가(私家)에서 청소와 요리를 하였다. 락스프링스에 석탄 산업이 발전되고, 많은 중국 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올 당시 한인들도 함께 왔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 대로 고려인삼을 팔았다고 생각 된다. 락스프링스에 석탄광 산업이 발 달하면서,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모집하였다. 『공립신보』 1906년 3월 12일자 기사에는 “일꾼은 몇 천명이라도 쓰기를 원하는데, 숙 식도 편리하고 일도 매우 좋은 고 로 불과 1년만에 한인 30~40명이 모였다”고 하였다. 1906년 당시 락스프링스 석탄광의 하루 임금은 1달러 80센트였고, 도급을 맡아서 하면 매일 2~3달러까지 벌 수가 있었다. 락스프링스에서는 석탄광 과 더불어 철로를 설치하는 일도 있었는데, 철로공사 일은 탄광 일 의 1/3 정도로 임금이 낮았다. 락 스프링스 석탄광 주선인은 미주 한인 역사에서 유명한 ‘황사용’이 었다. 황사용 목사는 국민회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멕시코 메리다에 파견되어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시켰다. 공립협회 락스프링스 지방회 조직 북미 최초의 한인단체인 공립협회의 락스프링스 경찰소가 설립되었다. 정확하게 언제 설립되었는지 락스프링스 석탄광 광부들의 숙소 모습 와이오밍주 락스프링스 석탄광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공립신보』 1906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