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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72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동지는 ’94년 창원 대우중공업 국민차 사업부에 입사하여 일을 하던 중 ’99년 2월 20일 산재 사고를 당하여 치료를 받게 된다. 근 로복지 공단은 제대로 몸 조차 가누지 못하는 동지를 통원조치 시키는가 하면 강 제 퇴원 조치를 했다. 동지는 힘겹게 통원 치료를 받던 중, ‘예전의 저의 모습으 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몸이 아프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 럽고 괴로울 것인 줄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라며 육체적 고통과 가족들에 대 한 미안함을 유서로 전하고 ’99년 6월 2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동지의 죽음이 근로복지공단의 관료주의적 업무처리 와 형식적인 자문의 제도에 그 원인이 있었음에도 7월 15일 배포한「해명서」에서 동지가 남긴 유서가‘유서의 일부분으로 생각된다. 그 전체를 보면 더욱 분명해 지겠으나’라며, 마치 동지의 유족이 유서의 다른 내용을 숨기고 있거나 조작한 것처럼 쓰고 있으며, 일부 언론사 기자에게도‘유서가 원래는 3장이었다’고 말하 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유서를 처음 발견한 동지의 이웃주민인 김청자(60세, 경남 사천시 사남 면 초전리)씨는 음독한 동지의 가족을 싣고 나가는 앰브런스 소리를 듣고, 동지 의 집으로 뛰어가 동지의 친척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찾다가 편지 봉투를 발견하였으며“봉투를 열어보니 1장의 유서가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유 서를 가족이 볼 수 있도록 TV위에 올려놓고, 가족이 돌아온 후 이야기하였다고 하였다. ’99년 7월 7일, 산재추방과 노동자 건강권 사수를 위한 마창지역 공대위는 근 로복지 공단창원지사 항의집회를 시작으로 사건이 알려지도록 7월 29일 유족과 공동대책위가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두 번의 농성장 침 탈과 탄압 속에서‘산재노동자 이상관 자살 책임자처벌과 근로복지공단개혁을 위한 전국순회투쟁’등이 지속되었고 155일간 투쟁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상관 (당시27세) 화 장 1972년 경남 사천 출생 1994년 창원 대우중공업 국민차 사업부 입사 1999년 2월 20일 산업재해 당함 1999년 6월 22일 자결 끝내살리라 |179| |17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