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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 다시 3·1운동을 기억한다 9 조와 논리를 직접 목격한 세대이기도 했다. 일본 유학생 사회는 단순한 학업 공동체가 아니라, 조 선의 현실과 미래를 둘러싼 문제의식이 집약되 는 공간이었다. 1918년 연말부터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토 론과 결사(結社)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본격적으 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은 개인적 희 망이나 감정적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냉정하게 사유되고 전략적으로 모색해야 할 과제였다. 특 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의 변화는 이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 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민족에게 새로운 정치 적 언어를 제공했고, 조선의 독립 역시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생들은 민족주의, 자유주 의, 공화주의적 사상, 근대적 시민 개념 등을 수용했 다. 이는 이후 독립운동이 무장 투쟁뿐 아니라 선언 과 여론, 대중 참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유학생 사회는 말하자면 근대적 독립운동의 실험장이었고, 새로운 방식의 정치 적 행 동을 모색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축적된 에너지는 1919년 2월 8일 도쿄에 서 결정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천명했다. 이른바 2·8 독 립선언이 그것이다. 이 선언은 우발적인 학생 시위 가 아니라, 사전 회합과 합의를 거쳐 준비된 집단적 정치 행위였다. 선언문에는 조선 민족이 독립을 누 려야 할 역사적·도덕적 정당성이 논리적으로 제시되 1919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도쿄 히비야공 원 입구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2 · 8독립선언을 높이 평가한 재일사학자 박경식(필자 제공) 3 · 1운동 당시 서울 덕수궁 옆 시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는   군중(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