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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우리 겨레의 영원한 정신적 자양인 윤동주(尹東柱) 시인 9 동촌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두 만강을 건너 하루만 걸으면 닿는 곳으로, 1899년 2월에 함경북도 종성과 회령 출신의 우국지사들이 집단으로 이주 해 살면서, 우리나라를 의미 하는 동쪽을 밝게 한다는 취 지에서 그렇게 명명했다.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한 사 람들 가운데 다수가 항일독립 운동에 참여한 사실은 그들이 그 뜻에 걸맞게 살고 자 했음을 보여주었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윤동주의 생애를 자세하게 설 명하기 어려워 특징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우선 그 의 외삼촌은 명동촌의 큰 어른으로 명동학교의 교장 이면서 항일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약연 (金躍淵)이었고, 그의 조부는 명동교회의 장로였던 윤하현(尹夏鉉)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어려 서부터 민족의식과 기독교신앙을 내면화하고 성장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화룡에서 은진중학, 평양 에서 숭실중학을 다닌 데 이어 서울에서 연희전문학 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릿쿄대학을 다니다가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옮겼는데, 이 다섯 학교 는 모두 기독교 학교들이었다. 항일정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서시(序詩)’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1941 년 11월에 그때까지 시들 가운데 18편을 뽑아 『하늘 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할 것을 계획하면서 「서시 (序詩)」를 따로 써 시집 맨앞에 게재하고자 했다. 그 것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 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 작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 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끝난 시 로,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 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시의 엄혹한 시국 때문 에 시집은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본유학 의 길에 오르던 시점에서 그의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鄭炳昱)이 그로부터 받아 고향 집에 은밀하게 감춰놓았던 19편에, 그의 연희전문학교 동기생인 강 처중(姜處重)이 훗날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12편을 합쳐 1948년 1월에 시집으로 출판될 수 있 었다. 당시 경향신문사 주필이던 시인 정지용(鄭芝 溶)이 서문을 쓰고 당시 경향신문사 기자이던 강처 중이 발문을 썼다. 이후 이 시집은 새로 발굴되었거 나 수집된 시와 수필 등을 추가해 여러 차례 출판되 었다. 문학평론가들은 이 「서시」를 높이 평가한다. 일제 강점기에서도 광란으로 치달리던 이 암흑기를 살아 윤동주의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오른쪽은 그(오른쪽 위)가 1942년 8월 중국(북간도)  용정에서 찍은 사진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여름 방학 동안 잠시 귀국해 고향에서 함께 자란  또래 친척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고, 이는 그가 고향에서 남긴 마지막 모습이  됐다(국민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