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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 ‘신 을사(乙巳)년’의 위기 9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피로써 되찾은 이 나라. 우 리는 언제까지나 자유의 나라, 안전하고 번영하여 행복한 나라로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 그 래야 순국선열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 리는 그러한 엄숙한 책무를 다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덕근 의병장이 형장에서 말없이 엷은 웃음만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 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한다. 일본의 국권 침 탈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던 의병이었 다. 그러나 그런 애국충정의 의병장을 장터 가운데 세운 말뚝에 묶어 놓고 지역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 운데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것은 일본군이 아닌 동족 경북 진위대 병력이었다. 처형 대에 선 의병장이 이런 모순된 현실 앞에서 무슨 말 을 할 수 있었을까? 분노하기에, 슬퍼하기에 앞서 너 무도 어이가 없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입가에 허탈 한 미소를 짓고, 부조리한 조국 현실을 말없이 하직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도 해본다. 1907년 그때 만약 우리 의 병을 겨누었던 우리 진위대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로 돌리고 관민이 합심하여 결사 대항했다면, 더 나 아가 위로 황제와 대신들이 의병과 합세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구국의 대열에 함께 섰다면 3년 뒤 1910년 의 망국이 있었을 것인가? 120년 전 을사년 그런 안타깝고 부끄러운 역사는 의병장 처형 2년 전, 1905년 을사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강요된 소위 을사조약으로 인해 초래되었다. 대한제국은 껍 데기만 남았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내 정 치도 이듬해 초 통감 부가 들어서 일본인 차관들이 좌지우지했 다. 여기에 이완용 등 을사 5적이 민족을 배 반하고 외세에 영합했 다. 이 기막힌 망국 상 황에서 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끊어 일제의 국 권 침탈과 을사5적의 매국 행위를 규탄했다.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독립운동가들은 그 을사년에 ‘왕과 대신들이 포 기 한 주권, 이제 국민의 것이 되었다’고 국민주권을 자 임했다. 일본 관헌의 통제를 벗어나 만주와 연해주, 미주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다. 독립과 더불어 국민주권의 공화정 수립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고난의 시작이었던 을사년- 그 이름만 으로도 우리 국민들은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무도한 일본 침략자들을 규탄하고 질타하 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주체로서 우 리가 깨달아야 할 역사의 교훈 전부일 수는 없다. 당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A:son Grebst)가 찍은 일본군의 1904년 9월 서울 마포에서의 김성삼·이춘근·안순서 의병 처형 장면(독립기념관 제공) 날카로운 역사의식으로 대한제국기 역사를 기록 『매천야록』을 남긴 황 현(1855~1910,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