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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는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 출신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신 파평윤씨 네분(건국훈장 애국장 윤익중, 건국훈장 애족장 윤형중, 건국훈장 애족장 윤낙중(기순)등 3형제 애국지사와 그 분들의 강질 헌국훈장 애족장 윤의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0월 26일 파평윤씨 화계종친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윤익중선생은 1919년 중앙고보 시절 김상옥이 주도하던 혁신단에 가입 '혁신공보'를 발간하였는데, 주요 기사로는 국내외에서 취재되는 독립운동 전선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등을 게재하고 1회에 등사판 1천부씩 찍어냈다. 1920년 3월 20일 구국민단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되었으나, 10월 26일 예심 종결로 풀려났다. 1921년 김상옥이 주도하는 암살단에서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낙중(기순)선생은 경신고보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형죽, ㅇㄱ중과 뜻을 같이하고 고향인 홍성군 작곡면에 내려와 구국 유지 인사와 인근 주민들에게 독립만세 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같이 참가할 것을 역설하였다. 맏형 윤형중, 당질 윤의석등과 함께 1919년 4월 7일 장곡만세운동에 참가한 500여명의 시위군중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 행진으로 도산리에 이르러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둥등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선생은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맏형 윤형중은 동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에 벌금 20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당질 윤의석은 이해 5월 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요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고, 8월 1일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여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