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age


9page

이듬해 광동 중산대학으로 적을 옮겨 김규선 장지락과 함께 항일단체인 유영한국혁명동지회에 입회하였다. 그해 8월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오성륜등과 항일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의열단에 입단하여 최하청 진공목과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28년 의열단으로 부터 일제의 침략 원흉을 처단하고 국내에 지하조직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님은 통영에서 항일투쟁의 민족 유일 전선을 구축한 신간회 통영지회를 조직하여 총무간사로 활약하니 회원이 90여명에 이르렀다. 1929년 경성 조선박람회 개최를 기회로 서응호 윤충식등과 일제 요인 암살과 주요기관 파괴를 기도하다가 서응호 윤충식과 왜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으며 김원봉 등 17명의 동지들은 미체포로 기소중지되었다. 출옥 후 계속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제 때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특별처벌법을 공포하여 님을 경상남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950년 6.25의 발발로 고향에 칩거하던 중 그해 8월 14일 아깝게도 참화당하였다. 님은 경주 김씨 선희와 결혼하여 아들 용민 용인과 따 경연 경자 경숙 5남매를 두고 손자 태우 태희 태성 태영 성주 성영을 두었다.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니 님이 돌아가신 후 45년 만에 비로소 우국충절과 애국애족의 활약상이 빛을 보게 되었다. 님은 일제 침략하에서는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한 충의의 기백과 희생 봉사로 젊음을 바쳤고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의 확립을 위해 온 몸을 던졌으니 천고 후에라도 님의 애국애족 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