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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⑤ 89 학교(현재는 폐교)로 받았습니다. 제 반의 한 학생이 원호대상자였습니다. 그때는 보훈대상자라고 하지 않고 원호대상자라 하였습니다. 그 학생에게 누구 때 문에 원호대상자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증조 할아버님이 의병‘염재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나는 그때 그분을 잘 몰랐습니다. 역사 교사가 내 고장의 유명한 의병을 모르는 게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나중 에야 그분이 안규홍 담살이(머슴) 의병부대의 염재보 부대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그 부끄러 움이 의병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홍영기 교수님의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란 저서를 보니까 백낙구 의병장이 맹인이라고 나오는 데, 정말 그런 분이었습니까? “저도 그런 사실을 알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처음부터 맹인이 아니라 의병 활동 중 (동학농 민혁명 이후) 악성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었습니다. 보통사람으로 시력을 잃으면 의병 활동을 포기할 텐 데, 그분은 불굴의 의지로 일제에 끝까지 항쟁하다 가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순간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묵념을 드렸다. 내가 감 히 그릴 수 없는 위대한 영웅이시다. 일제 강점기 때 두 눈을 뜨고 산 게 부끄럽지 아니한가. 친일 부 역행 위를 한 이들이여, 맹인 백낙구 의병장 앞에서는 그 대들의 어떠한 변명도 구차하지 아니한가. 백낙구 의병장 행장 - 백낙구 의병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은 전주의 이족(吏族, 향리, 아전) 출신으로 짐작되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을 쫓는 초토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 관군이었다가 의병이 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사실 그 무렵에는 그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백낙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어수선한 분 위기와 썩어빠진 정치의 난맥상을 바로 잡으려고 노 력했습니다. 하지만 미관말직에다 당신 혼자 힘으로 는 불가항력이라는 점을 깨닫고 아예 관직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후 그분은 청나라 요동(遼東)과 심양 (瀋陽)을 넘나들며 시세를 관망했습니다. 그러던 가 운데 악성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는 광양의 백운 산에서 은거했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라 는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소식이 산중에까지 전해지 의병답사 길을 안내한 고영준 선생(왼쪽)과 홍교수당시 순천대학교 사학과 홍영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