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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을 도모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기도 하고 때때로 종로에서 민족단결의 열변을 토하며 노래와 시로써 비분을 달래고 국채보상운동 에도 앞장서며 큰일 할 때를 기다렸다.
나라운수는 침략자 일본국의 계획적인 농간으로 점점더 기울어져 가더니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흉계가 적신들과 내통되어 一九○五년에는 끝내 을사보호조약 을 당하여 주권을 송두리째 빼았기자 고종황제 를 가까이서 모시던 동엄 선생은 황제의 밀령을 품고나와 나라를 지킬 최후수단 으로 무력항쟁 을 계획 주도할새 단오공 은 그뜻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피끓는 격문으로 의열지사들을 모아 산남대의진 을 창군 그로부터 줄곧 일본군의 정벌에 들어갔다.
의진의 전성기에는 각 고을마다 분진을 두었으니 규모가 방대했음 을 알 수 있으며 기록상 전하는 격전만도 五七회이니 항쟁의 치열했음 도 알 수 있다. 흥해와 청하는 세 번씩 함락하여 소굴을 불살랐고 장기 청송 의성 의흥 신령 등도 무기를 노획하고 혹은 불살랐다.
신성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및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와 북동대에서도 크게 이겼으며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운문산 등에서도 잘 싸웠다. 불리했던 싸움은 영덕 유암과 청송 고아실 및 팔공산 접전으로 많은 의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천과 도평의 혈전에서도 냇물을 붉게 물들였으며 운주산 전투에서는 안국사를 태웠고 보현산 전투에서는 비상사를 태웠다. 입암 전투에서는 단오정대장이 이한구 중군과 손영각 참모를 더불어 순국 장령이 무너지므로써 의진이 한때 흩어지기도 했다.
총수 동엄 선생은 의진을 다시 규합 백발을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여러 고을의 적을 격파했으나 청하에서 사로잡히어 대구로 호송 적장의 만단유세 를 뿌리치고 영천으로 환송되어 조양각 아래서 『이몸이 죽은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대의가 무거울 뿐 죽음이야 가볍도다. 나의 뒤를 그 누구에게 부탁할꼬. 뜻을 못전하고 임종이 닥아 오다.』 라는 임종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총수 유명으로 최세한이 지휘권을 이엇더니 그로부터 의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영의 남북전역에 흩어져 곳곳마다 서릿발치는 항쟁사를 남기고 살아남은 의사들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서 조국 삼천리와 대륙만리를 휘날리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을 맞았다.
돌아볼 때 이산천 어디엔들 의사들의 피로 물들여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 그러나 모두가 어떤 명예나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의병에 꼭 가야할 의무도 없었다. 무기나 옷이나 군량을 보급해 주는 기관도 없었다.오직 끓어 오르는 구국 일념으로 산과 들을 누비면서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생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