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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뒤를 따라 간행으로 수원까지 도착했다. 지친 몸으로 선공앞에 나타나 깜짝놀라게한바 있으니 공의 나이 아홉살때다. 부친인 부호군신기선 서울집에서 머물었으나 유학의 여건이 맞지않아 얼마후 귀향하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앞날 벼슬길에 많은 영향을 받은바 있다. 16세때 속리산 천와봉밑에서 백일간 기도를 드릴때는 처공의 호위를 받은바있고 청화산 수도때는 신도사의 지도를 받았다. 학덕이 무르익은 공은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으니 옥강우체사주사요 당시 27세다. 이어 광주 공주 강계 해주 한성 성진 전주등지로 두루 다녔으니 그때 판임관4등이다. 광무 병오에 맹산군수로 전임되었으나 목민관으론 처음이다. 이듬해 정미에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내각이 성립되자 평소 이를 증오하던 공은 그날로 용퇴하였다. 원래 항일정신이 투철한 공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주에 주둔중인 일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무기열세로 실패하게 되자 정신만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공은 해외에서 군대를 길러 권토중래할것을 계획하고 곧 망명을 서둘렀다. 장남 명의의 결혼날을 앞두고 훌쩍 떠났으니 때는 무신5월 5일이다. 그후 다만 입던 옷만 보내왔고 소식은 해삼위에서 경술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차남 혁의의 결혼식을 앞두고 장남이 공을 모시려 천신만고끝에 해삼위에 갔다. 공은 그곳에서 이름을 신이라 고쳤고 계동학교장으로 재직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공은 이미 딴지방으로 떠났다는 후문이다. 찾아갈길 막연하여 피눈물을 머금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배는 양천허씨니 기사10월 10일 생이고 경자 3월 17일 졸하니 수 92요 묘는 큰골 곤좌원이다. 용과 조와 영과 찬은 손이요 질에 진의며 변락규 박지평 허영은 손서니 증손 입하는 생략한다. 금번 사적비세울새 사손 용씨 가장을 갖고와서 글을 청해왔다. 그 장을 읽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공은 충효가 겸비한 분이다. 나라와 겨례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으니 충이요 그 선영의 제각인 영모제를 제종에게 창의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