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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5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사 다시 구속되어 3개월에 걸쳐 복역함으로써 일제강 점기에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된 기록을 남겼다. 고하 의 항일정신이 이처럼 투철한 것을 알고 일제는 패 망을 앞두고 고하를 비롯한 국내의 민족지도자들을 회유하거나 살해하려 하였다. 고하는 칭병하면서 칩거하는 것으로, 특히 조선총독부의 치안권 이양 제의 교섭에 일절 응하지 않는 것으로 맞섰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마침내 패망하고 조선 =한국은 비록 분단과 함께 찾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해방을 맞이했다. 이때로부터 흉탄에 쓰러진 1945 년 12월 30일까지 137일간의 기간에 고하는 민족진 영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국민주당 창당 을 이끌고 수석총무로 봉직하면서 국권 회복과 정부 수립에 힘을 쏟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이 시기에 있어서의 고하의 활동은 이미 여러 학자에 의해 자세히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서평자는 이 주 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고하의 정치노선 또 는 그 노선의 기반이 된 정치이념에 대해, 위의 책에 게재한 박찬욱 교수의 「송진우의 삶을 통해 바라본 YMCA운동과 자유민주주의」, 강원택(康元澤) 교수 의 「해방 후 고하 송진우의 정치구상」, 그리고 박명 림(朴明林) 교수의 「송진우의 중용적 진보와 근대국 민국가 건설」 등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박찬욱, 송진우를 사회민주주의를 이해한 ‘포용력 있는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로 해석 우선 박찬욱 교수는 고하를 ‘자유’의 가치를 소 중히 여기는 자유민주주의자로 자리매김하면서도, ‘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이해 한 ‘적극적이고 포용력 있는 진보적 자유민주주의 자’로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박찬욱 교수는 “고 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여 대체하는 대안을 모색 하기보다는 그것을 관리하고 규제하며 […] 사회민 주주의적 정책을 보완책으로 인정했다”라고 설명 했다. 강원택 교수는 고하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엄 격한 지도자’였다고 논평하고 “고하는 자유민주주 의 체제를 중시했고, 계급이든 개인이든 독재에 반 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라고 부연했다. 강 교 수는 동시에 “고하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좌파와 좌파까지 망라한 국내 주요 정치세력 간의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는 등 매우 포용적인 리더십을 보였 다”라고 부연했다. 강 교수는 이러한 고하를 “해방 직후의 전환기에 잃은 것은 민족적으로 큰 손실이 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박명림 교수는 고하가 평생의 동지 인촌(仁村) 김 성수(金性洙)와 함께 해방 직후 건국노선의 이념으 고하 송진우(1889~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