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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4년 6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불행하게도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듬해 봄까 지 접전일기에 기록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간 동안 추위와 병고로 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3월 다시 적과 격렬한 교전을 재개하였다. 3월 8일 대장 서리 강무경(姜武景)·박봉주(朴奉柱)·박 채홍(朴彩洪) 등과 나주 월교리에 머물다가 밤에 남 평 운삼동에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찰대 로부터 적이 내습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심 의병장 은 미리 의병들을 요소요소에 매복시켰다가 적 5명 을 사살하자 적은 영산포로 달아났다. 이에 더 적극 적인 전투를 전개해야 할 것을 계획하고 인근 전해 산 · 안규홍 · 이대극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펴 기로 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안규홍과는 끝까지 유 기적 관계를 맺었다. 3월 11일, 적의 내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능 주 풍치 좌우에 잠복하고 있는 데 적병 4백여 명의 포위 공격 을 받았다. 전투가 여러 날 계속 되어 적 일백여 명을 죽였는데 도 적은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세부득이하여 징을 쳐서 적을 교란한 뒤 두문 북쪽으로 후퇴 하였다. 이 전투에서 심남일 의 병장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대 해 다음과 같은 동요가 생겨났 다고 한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남일 심수택의병장 기념관’안의 위충사에 모셔져 있는 심남일 의병장 영정 광주공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