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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4년 4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점거한 강용언(姜龍彦)의 부장(副將)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首魁)가 돼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 (郡)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 백 명을 넘었고, 전해산 · 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 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 - 『전남폭도사』 137쪽 에서 1900년대 초 의병항쟁사에 큰 금자탑을 세우다 1907년 전후로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크게 일 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 지 않았다.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마 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안규홍은 국난을 당하자 평소 마음속에 품어왔던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의 길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을 『대한매일신 보』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근간(부지런 하고 성실히)하고, 매우 신실하기에 주인이 사랑 하며, 이웃동네에까지 칭찬이 자자하더니 지난해 9월, 갑자기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 지 아니하고 가더니, 근처에 있는 머슴 일백여 명 을 모집하여 연설하며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남 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 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하고, 의병을 일으켜 호남 남일(심남 일)파와 합세하였다고 하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 자 ‘머슴꾼 의병’(고어를 알기 쉽 도록 현대어로 고쳤음) 그때 안규홍을 따르는 자가 까마귀 떼가 몰리 듯 했지만,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사꾼들로, 그 들은 고작 호미나 괭이와 같은 농기구를 가졌을 뿐 이었다. 그때까지도 유생들은 그와 함께 창의하는 걸 수치로 알 정도였다.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곧 재정 후원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관동사람 강용언(姜龍彦, 이명 姜性仁) 의병 부대가 강원도에 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진압을 피해 전라도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안규홍을 기꺼이 맞아들여 부장(副將)에 임명했다. 강용언 의병장에게는 토착 의병 안규홍의 가세가 현지 지리에 어두운 약점을 보완해 주고, 또한 지역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주는 등, 큰 도움 을 주었다. 하지만 강용언 의병장은 주민의 재물을 탐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인 데, 일도 하기 전에 재물을 탐하고 백성에게 포악 한 짓만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안규홍은 강용언 의병장을 꾸짖었다. 하지만 이를 듣지 않자 그를 즉결 총살하였다. 강용언이 제거되 자 비로소 군기가 바로 잡혔다. 안규홍은 여러 부하 들의 추대로 마침내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서울에 서 내려온 해산 군인 오주일(吳周一) 등 수십 명을 포 섭하여 항일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게 되었 다. 곧 대장 안규홍을 비롯한 토착 농어민 출신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