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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부상에 전치까지 탈락되어 방면 후에도 줄곳 신고를 당하시더니 익일 1920년 9월에 만주 독립군의 거성 김좌진의 진중으로 드러가 특히 군자금 모금 임무를 맡으시니 당년 초동 압록강의 살어름을 타고 비밀리에 재입국하시다 기히 듯을 같이하였던 김영진을 예산군 삽교 자택으로 심방하여 김형제 노재철 이창호 등과 함께 모금계획을 수립하고 지역을 분담하여 출발하시니 공은 도내의 부여 보령과 밑으로는 전라남북 일대의 친일 부호가를 훑으며 수집한 것이 전표와 현찰을 합하여 6천 4엔에 이르렀으니 미곡 6천입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라. 지금 대폐 3억이 넘는 거금이 아니겠는가. 공은 재만 동지의 활력을 하루 속히 돕고저 간도로 급향 중이었는데 경기도경의 미행을 당하야 월경 직전에 다시 피집되여 경성 복심법원 판결로 서대문옥에서 2년 2개월의 실형 끝에 1923년 5월 9일 출옥 귀향하시다. 이후 왜경의 감시는 가중된데다가 옥고 끝이 신병이 도한 중첩되어 유사시마다 당하는 예비검속으로 공의 일생은 형극의 연속이시었다. 1945년 8월 조국광복을 보시고는 비록 포병약신이나 반공 통일에 앞장서서 우국일념이시더니 1965년 9월 23일 서거하시다. 세인이 개탄하며 백제의 성미가 마저 낙산하였다더니 1977년 12월 13일 나라에서도 공의 건국공로를 기리고저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시다. 공의 배는 밀양 박씨시며 유숙덕하사 내조가 깊었다 한다. 유자로는 2남 3녀를 두시니 자에 동온 동엽이요 손은 성환 대환 두환이가 있다. 공을 이곳 내산면 천보리 산 3번지에 건좌로 안장하시니 열렬한 애국정신은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