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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생각하는 역사 • 『거인(巨人)의 숨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글모음 및 관계자료집』 서평 87 올리지 않았으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17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 17인에는 송암(松岩) 함태영 (咸台永)을 비롯한 기독교 4인과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기당 (幾堂) 현상윤(玄相允) 등 중앙학 교 교사 2인, 그리고 독립선언서 를 기초한 육당(六堂) 최남선(崔 南善) 등이 포함된다. 이 17인에 대해 박찬욱(朴贊郁) 교수는 그 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전제하면서, “고 하와 육당은 남강(南岡) 이승훈 (李昇薰)과 교섭하며 기독교 인사 들과 연락했고, 남강은 기독교 장 로인 송암 함태영, 송암은 YMCA 간사 박희도(朴熙道)를 접촉하는 식으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라 고 설명한 데 이어 “고하와 송암 은 옥에 갇힌 사람의 가족을 돕 는 등 뒷수습을 하면서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부연 했다. 그들 가운데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던 고하는 중 앙학교 숙직실에서 일제 당국에 검거되어 경찰수사 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고하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 으나, 함구로 일관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의 취조서(1919년 4월 18일), 경성지방 법원 예심부의 예심결정서(1919년 8월 1일), 고등 법원 특별형사부의 예심결정서(1920년 3월 2 2일) 등은 모두 고하를 ‘기독교 인사들과 연락한 모의 단 계의 주모자’로 기록했다. 결국 고하는 1년 반의 미 결감 생활을 마치고 1920년 10월 1일에 출옥했다. 고하는 1920년 3월 4일에 창간한 『동아일보』를 이 끌면서 항일독립의 논조를 펴다가 1926년 11월에 1917년 11월 북악산 자락 아래에 들어선 중앙학교 본관(가운데)은 민족운동가들을 양성 하는 장안의 명소가 됐다. 본관 오른쪽 아래로 3·1운동을 모의한 숙직실이 있었다(동아일 보 제공). 송진우 등이 3·1운동을 준비, 협의했던 중앙학교 숙직실 전경. 지금은 '3·1기념관'으로 활 용되고 있다(서울경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