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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⑤ 87 연히 전체 교육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사’를 따로 가르쳐야 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고 하시면 서, 해방 후 우리 근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육 당국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나의 부끄러 움을 덮어 주셨다. 몇 해 전, 내가 현직으로 있을 때 한 학생이 대학 수시 입학시험을 치른 다음날 등교하였는데 표정이 밝지 못했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면접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물었는데 답변을 제대로 못했다면서 아무래도 시험에 떨어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순간 ‘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꾸중하려다가 이내 내 얼 굴이 화끈거렸다. 50여 년을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한 결같이 배우고 가르쳐 온 나도 독립지사나 의병장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그런 부끄러움에 뒤늦게나마 내가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지사나 항일 의병장 전적지와 후손을 찾아다니면서 그때의 일들을 듣거나 보고 배운 뒤 그런 사실들을 알기 쉽게 글로 가다듬어 다음 세대 에게 전하는 까닭이다. 맹인 의병장 백낙구 나는 유독 의병이 많은 호남지방 전적지 답사에 앞서 여러분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뒤, 그 답사 순서 를 고심하다가 그때 내린 결론은 나라를 위해 목숨 을 바치신 선열의 공훈 순서를 정하는 것은 부당하 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분의 목숨도 귀하지 않으랴. 그래서 세운 대원칙이 후손 연락이 가능한 곳부터 먼저 찾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맹인(장님) 백낙구(白樂九) 의병장의 기록을 보고는 감동과 함께 적잖은 의문에 싸였다. 보통사람의 경우 팔이나 다리 한쪽을 상해도, 아 니 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아예 병역 면제를 받고, 군 복 무나 훈련도중 그런 부상을 당하면 의가사(依家事) 제대나 상이군인으로 명예제대를 하게 마련이다. 그 런데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용맹한 의 병장으로, 끝내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방송프로에 나올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런 역사에 감동한 나머지 백낙구 의병장을 먼저 취재하자고 길 안내자 녹천 고광순(高光洵) 의 병장의 후손 고영준 선생에게 부탁드렸다. 며칠 후 강원도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고선생은 전남 광복 회 등 여러 의병 후손에게 사방 수소문을 했으나, 백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 종군기자로 한국에 왔던 맥켄지 (Frederick A. Mackenzie)가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촬영한  ‘항일의병’의 모습(경기일보 제공). 유생 · 농민 · 군인 · 상인 · 포수  등 각계 각층이 오직 구국일념으로 대일항전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