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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⑨ 87 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은 그의 논평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다툼을 바탕으로 화평에 나아가고, 백성의 약속 을 바탕으로 나라를 건립하였다는 주장이니, 그 이론이 곽씨[토마스 홉스]의 주장과 마치 한 목 에서 나온 듯하다. 다만 묵자는, 군권(君權)이 한 정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하늘 에 그것을 위탁하여 통솔케 하였으니, 곽씨의 사 상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장차 천하의 백성을 해치는 자가 뭇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데도 그것 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곽씨가 묵자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셋째, 시(詩)와 이학(理學)의 관계는 어쩌면 ‘감성’과 ‘이성’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유건(劉健)이 라는 학자의 시인에 대한 비아냥을 비판하는 석주의 모습에서 필자는 ‘날카롭지만 여유있는’ 석주의 모습 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모서하(毛西河)의 ‘까칠함’을 지적하는 부분에 서는 석주의 ‘치밀하지만 부드러운’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학자연’하는 사람들의 ‘터럭을 헤쳐 흠을 찾 으려[吹毛摘瘢]’는 치졸한 행위를 비판하는 석주의 모 습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반성을 하게 되 었다. 이제 언제나처럼 자세를 바로하고 석주의 일기 를 읽어 보자. 4일 시화를 읽었다. 왕맹루(王孟樓)가 이르기 를, “시에서 가수(家數)를 일컫는 것은 마치 관에서 아 문(衙門)을 일컫는 것과 같다. 아문에서는 스스로 총 독을 크게 치고, 전사(典史)를 작게 친다. 그러나 총독 아문의 담수부(擔水夫=물통을 메는 장정)를 전사에 비교한다. 아문의 전사(典史)는 또한 전사가 될 것이 지, 담수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문인, 사상가 한유(한창려, 768~824) 중국 화가 왕덕년(王德年)의 ‘동파야영도(東坡 夜詠圖)’ 명나라 황제에게 ‘선생’으로 불린 유건 초상화 (출처: 중국인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