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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설립된 평화스러운 문화촌이다.
기미년 3월2일 고종황제의 인산 봉행식에 참여한 지방유지 김세민, 여봉준, 김주현, 윤기선, 황병민, 하갑수, 한세호, 정영실, 김홍찬, 김갑일, 황경수, 김차선, 안수원, 김정오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와 3월6일 새말 예배당에서 김두량, 김수감, 이만웅, 여경천, 곽진수, 손학봉, 김금석, 림경환, 엄태경, 김만옥, 김윤석, 김성추, 황출이, 배양전, 박기우, 구제남, 이명이, 황마리아, 이귀애, 김혜림, 이선옥, 김혜숙, 김장덕, 곽성복, 임순우, 엄또일, 윤봉수, 진익이, 김순과 함께 모여서 3월9일 연개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그 대책위원으로 윤기선, 여봉준, 곽성복, 김정오, 김주현을 선정일임하여 비밀리에 3일간 모든 대책을 세우다. 3월9일 정오 연개장터에서 남녀노소 수천군중이 총궐기하여 대회장 김세민의 개회사에 이어 유광도 격려연설, 김정오 선언문 낭독후 경명학교 학생들은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너무나 감격에 복받쳐 울기도하고 산하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에 산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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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행렬에 앞장선 분은 위에 기명한 이외에 문장환, 박쾌일, 하숙찬, 김도근, 김도석, 김경돈, 김찬욱, 차서식, 구사문, 김영수, 김성요, 배희도, 김우천, 김용이, 김우진, 이유근, 임용이, 곽종철, 이상안, 조은성, 김백은, 윤봉인, 양성만, 윤한경, 구찬문, 구역조, 윤봉기, 차학련, 차만갑, 한명수, 전수업, 이덕호, 황진규, 임제한, 김학률, 김영정 외 지방유지 다수이고 학생은 하갑조, 박종실, 윤효준, 차용학, 문삼갑, 배대위, 구주현, 김삼백 외 전원이다. 일후 칠원읍과 영산읍에 연락하여 칠원에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김성협, 영산에 김추은, 장진수, 구중회 등이 만세를 주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삼칠방면은 마산경찰서 칠원 주재소 관할이므로 뒤늦게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윤기선, 여봉준, 한세호, 내외분들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관련자 다수가 구출되고 김세민 내외분은 수감자와 그 가족 생계비 조달을 위하여 많은 곤욕을 당했다. 김두량, 정영실은 칠원읍 만세사건 주모자로 마산 감옥에서 각 1년, 김정오는 서울 악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학생주모자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임학찬은 창신학교 재직중 기밀 연락관계로 서울감옥에서 1년간 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