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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없다고 하고 다음해에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 의병의 재거와 국권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인 1913년에 객지에서 돌아갔으며 다음해에는 숙부 제설이 또 다음해에는 족종조 의암 류인석과 부친 항재가 차례로 돌아가니 이제 지사 형제는 만리 타국에서 의거할데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사는 부조의 뜻을 이어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회인현 대야하에서 아우 민상과 김용필 음성국 음성진 이길용 장인도 이동만 안중학 및 중국인 장껑호(본명 영방) 등 동지 180여명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홍익단과 합세하여 전투준비를 하던 중 왜병의 기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지사는 이름을 효준 효남으로 바꿔가면서 활동을 재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또 국내로 잡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5년에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게 되었으므로 가족이 무순현감옥으로 가서 인수해오다가 중도에서 운명하니 때는 1935년 7월 19일이었다. 동지 음성진 등이 시신을 무순현 용봉 항남산에 장사지내고 돌에다 류자만 새겨놓고 돌아왔다. 그 후 광복으로 가족들이 귀국하니 중국과는 연락이 두절되고 50여년 동안 세월만 흐르다가 1993년 4월 13일에 이르러 정부에서 지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를 계기로 지사의 아들 연익씨가 부친의 묘를 찾기 위해 1994년 7월 15일에 중국 무순으로 가서 해성시 일원을 수소문하였으나 지형의 심한 변화로 인하여 마침내 찾지 못하고 묘소 부근의 흙 한 줌을 가지고 돌아와 춘천군 남면 관천리 선영하에 혼백장을 지내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지사는 의병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살아서는 위난속에서 지내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고 죽어서는 60여년을 적막한 이국 산야에서 방황하였으니 그 애절함을 어찌 다 표현하랴. 다행히 혼백이나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니 이제 지사는 편안히 눈을 감고 명복을 누릴 것이다. 지사의 전배는 함열남궁씨이니 1894년에 태어나 1922년 6월 13일에 만주에서 돌아가니 그곳에 모셨다가 1930년에 지사가 선영하로 이장하였더니 이번에 지사의 혼백과 함께 합폄하게 되었고 후배는 죽산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