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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025년 9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서 와서 초호전(蕉戶錢) 2각(角) 7자(字)를 받아 갔다. 8일 쇠고기 9각 어치를 샀다. 중양절(重陽節) 을 쇠기 위해서이지만, 차례는 지내지 않으면서 공 연히 제 입과 배만 채우려니 죄스럽고 한스러운 일 이다. 9일 이교창이 영춘원(永春院)에서 돌아왔다. 우식이 와서 손자 정로가 잘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위 로가 되었다. 10일 아침에 육손이 부역을 갔다. 이교성이 고 추 몇 사발을 가지고 와서 안채에 인사를 건넸다. 이 는 족친(族親) 간의 정의가 두터웠기 때문이다. 남쪽 가장자리 터에 소 우리를 고쳐지었다. 아들 형식이 순경관(巡警官)을 만나러 갔다 달이 뜬 뒤에야 돌아 왔다. 11일 이형국이 대우구(大隅溝)로부터 와서 손 자 창로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족종(族從, 같은 일족 의 조카벌) 우식이 청구의 개간하지 않은 땅을 가보 고 와서, 점심을 먹고 돌아갔다. ‘굴라령에서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변고가 생겼는데, 해 를 입은 사람은 청인(淸人, 중국인)이고, 도적은 붙잡 히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가슴이 떨리고 두렵다. 12일 저녁에 권중엽과 이형국이 와서 잤다. 밤 2경(更)에 이웃에 사는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총을 메고 와서 말하기를, ‘강도 마흔 명이 방금 합밀구(哈 蜜溝)의 상점으로 갔으니, 미리 방어할 계책을 세우 라’고 하였다. 새벽이 되도록 등불을 켜놓고 있었으나, 다시 아 무런 변동이 없었다. 대개 우리는 아무 가진 것 없이 맨주먹으로 한갓 두려워하기만 하니, 주면 주는 대 의암 유인석 의병장이 을미의병 봉기 후 망명하여 1900년 8월 경 까지 2년여 동안 거주했던 통화현(서간도) 패왕촌(霸 王村, 팔왕동) 마을 전경(강원도민일보 제공). 그는 1900년 중국 화북지방에서 일 어난 ‘의화단(義和團)의 난(의화단운동)’ 여파로 귀국하고 말았다. 김대락의 조카 김규식(1880~1945, 애국장)이 중국 봉천성(奉天 省, 현재 요녕성) 무순역(撫順驛) 앞의 신전동일조통(新前東一條 通)에서 운영하던 동아여관 터(독립기념관 제공). 김규식은 한족회 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했으며, 동아여관을 운영하여 독립운동 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