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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이신 묵제공 휘 언공공의 13세손이다. 공은 1907년 8월 일 과역면 분천에서 팔영산 정기를 받아 영만공과 밀양박씨의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총명하고 의기강의하여 학문과 충효심이 뛰어났다. 과역보통학교 2회 졸업한 후 부안임공 영화의 따님 명례규슈와 혼인하셨다. 광주 사범학교 3년 재학중 공은 일제의 민족 탄압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광주고보 광종업 광주사범학교 광여고 스피아여고보생들과 모의 항일 비밀결사인 혹진회를 조직하였고 뒤이어 항일민족문화와 항일사회교육연구를 목적으로한 독서회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까지 결성하는데 주동하셨다. 공은 젊은 한 목숨 바쳐 조국 광복을 이루겠다는 일념에서 기회를 보던 중 1929년 11월 3일을 기하여 하늘을 찌른 광주구국학생들의 의가가 함께 공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니 공은 그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맨주먹으로 삼엄한 일제의 총칼앞에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에 호응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수만학생들의 천지에 진동한 함성은 간악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렀으며 세계만방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정신을 찬양케 하였던 것이다. 공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2년 9개월간의 옥고로 명존 경각이 된 채 대구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하셨으나 가족과 동지들의 피어린 교요의 보람도 없이 1933년 2월 16일 청춘을 조국광복 위해 한 목숨 바치시니 향년 29세였다. 공이 가신 지 13년 만에 조국광복이 되고 1985년 8월 정부에서 공의 충혼을 기려 묘비 건립 보훈금과 고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