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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선생은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유림대표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제출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계승하여 이를 발전시킨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광무황제 초에 음보(蔭補)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광무 7)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國權侵奪條約)인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이 늑결되자, 이 조약의 폐기 및 조약체결에 참여했던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910년(융희 4)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비분함을 달래지 못하고 귀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던 중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을 통분해 하던 그는 마침 일제가 광무황제에게 강요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 유림들이 들어있음을 알자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그는 소위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을 지어 김복한(金福漢) 등과 같이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다. 그후 이 파리장서는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의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이해 4월 12일 경북 성주(星州)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유림 송회근(宋晦根)에 의하여 파리장서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거창(居昌)헌병대로 연행되었다가 대구(大邱)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해 3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이해 7월 19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