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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는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38년 일본 동경의 입교(入敎)대학 재학중 원용오(元容五) 등과 10수회에 걸쳐 만나 항일사상 고취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귀국하여 독립자금 모집 및 학교를 건설하여 교원을 양성,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 3월 입교대학 졸업 후에는 동경의 회사에 취직하여 교포 회사원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등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4월 귀국하여 그의 형이 경영하는 동방흥약사에 근무하면서도 이러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1월 부산에 출장 중, 화가산(和家山) 경찰 형사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같은 해 3월 26일 화가산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1945년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광복후 1946년 5월 윤봉길·백정기·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 되었으며, 동년 6월 2일 부산의 영도(影島)교회에서 추도식을 갖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