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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⑭ 83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 념하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 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 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 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 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 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이었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 로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 계승하였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韓國)의 복구 (復舊)’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 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및 방화와 같은 활동 을 펼쳤다. 1908년 11월에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으로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수비대 와 접전하여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9년 4월 동복 서유촌 전투에서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 를 입었고, 그해 5월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 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는 무기의 열 세도 있었지만, 밀정들의 밀고로 일제 토벌대에게 기습을 당한 때문이었다.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 1909년 12월, 양상기 의병장은 남원 도통리에서 은거 중 일제 토벌대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控 訴 - 항소의 옛 명칭)하였다. 하지만 1910년 5월 17 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한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 을 선고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1일,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순국한 지 두 달 뒤, 똑같은 장소(대 구감옥소)에서 아들 양상기 의병장 교수형이 집행되 었다. 그때 양상기 의병장 나이는 27세였다.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백마산에는 부자 의병장 양진여·양상기 묘소가 양지 바른편 기슭에 위아래 로 모셔져 있다. 아래쪽 아들 양상기 무덤은 시신 없는 가묘(假墓)라고 했다.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처해 진 뒤, 시신을 곧바로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자 의병장 순국으로 가족들이 풍비박산되고 쑥 대밭이 된 집안에 누가 곧장 달려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겠는가. 양상기 의병장이 취조과정에서 남긴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 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 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 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일제가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 이다.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다만 죽음이 있을 뿐 이다.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 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