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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석오 이동녕, 신흥무관학교에 꿈을 심다 83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대한제국의 선포 등 참 으로 많은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 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석오로 하여금 자신 이 조국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오는 1892년 임시로 시행된 응제진사시 (應製進士試)에 급제하면서, 나라의 일에 관심을 기울 였다. 1896년(고종 33년),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 商在) · 안경수(安駉壽) · 김가진(金嘉鎭) · 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회원으로서 국가의 근대화와 민족의 자립운동에 앞장섰다. 1898 년 3월 10일, 석오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개최된 제1차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 를 척결하고, 비자주적 외교를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 다. 이에 이은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의 제3차 만민공동회에서는 조정의 매국적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민중들로 하여금 ‘이제 우리도 깨어나 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나라는 나날이 기울어져갔다. 1904년, 미국을 위시하여 각국 공사관이 거류민 보호를 구 실로 삼아 군 대를 서울에 입성시켰다. 그리고, 일본 은 1904년 2 월 23일 한 일의정서(韓 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 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 섭을 시작했 으며, 한국으 로부터 황무 지 개간권을 얻어내 한국 을 영구적으 로 예속화하 려는 획책을 꾸몄다. 석오 이동녕(국가보훈부 제공) 북간도 용정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학교 서전서숙(독립기념관  제공) 1900년대 초 서울 상동교회 전경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신흥학교 터 추정지(한국학중앙연 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