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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섭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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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대한민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3.1운동과 가래비 만세 배미. 역사가 있는 나라는 반드시 興한다고 한다. 이 자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다한 가래비 만세 배미 현장이다.
○ 풍운의 왕조 : 1876년 고종 13년 조일수호조약에서 1907년 헤이그말사사건으로 고종이 양위하기까지의 32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가장 격심한 국난이였다.
○ 일본의 침략 : 소위 천황 중심의 통일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강제적인 한일수호조약을 시발로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처, 경제침략을 계속하다가 급기야 을사보호조약을 강압 조인하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 8월 29일은 500년 조선왕조의 사직(합방조약)이 종이 한장으로 종적을 감춘 날이다.
○ 3.1독립운동 : 1919년 3월 1일 거행된 독립운동은 도립을 (즉각) 쟁취하는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기초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 가래비(3.1)만세운동의 비극적인 참상 : 1919년 3월 18일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4 답(논배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나라의 주권을 찾고자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하는 950여명의 군중들을 향해 일본군이 총탄을 발사한 독립운동으로써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 등 세 명의 애국지사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순국하였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 : 제국주의를 부르짖던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국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을 통해 극동및 아시아 전역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천황의 육성을 통해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조국광복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기념비 건립및 3.1절 행사거행 :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 사업회는 가래비 만세운동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986년 가래비 모퉁이 하천부지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그 후 20여년간 3.1절 추념식을 거행하며 만세배미의 역사를 되살려 후순들이 잊지 않기를 호소하고 있다. 또한 2003년 3월 1일 광적청년회와 함께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그대로 재현하였는 이 때 부터 가래비 만세배미 3.1절 해젼행사가 해마다 치뤄지고 있다.
○ 가래비3.1운동 순국기념비 건립(2007년) : 가래비 3.1운동순국기념비는 양주시의 공원화 사업으로 당시 만세배미의 현장이었던 곳에 부지를 마련하여 2007년 새롭게 건립하였다. 이곳은 논을 매립한 습지이어서 안전한 공사를 위해 지질 시추 답사를 하였고 지하 23m아래 암반이 있어 콘크리트 말뚝 13개를 막아 기반을 다졌으며 비석이나 병풍석 등은 원석 통판을 사용 제작하였으며 난간석의 모양은 광화문에 있는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을 참작하여 고전미를 살려 제작하였다.
○ 기념비문 :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의 비문을 근대사를 연구한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 박사가 썼는데 조선 왕조 몰락 후 을사보호늑약 등 배경과 동기를 고찰하고 전국적인 3.1운동과 가래비 만세운동 항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체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인 양택동 선생이 직접 쓴 예서체로써 글씨 각자를 수공(손각자)으로 새겼다.
○ 동상과 독립선언서 : 순국지사 백남식 선생(52세), 이용화 선생(43세), 김진성 선생(45세)의 동상을 고증을 통해 흉상으로 제작하였는데 이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제일의 충성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3.1운동의 당위성과 국가 보위의 의무감을 담겨있다.
○ 추모제향 :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정신을 받들어 이곳에서 매년 3월 18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
○ 가리배 만세배미의 역사가 살아남 : 가래비 만세배미는 3.1운동의 역사를 살리고자 하는 성지로써 양주시의 예산지원과 민간의 성금 협찬으로 설립되었으며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후세교육의 도장으로 사용되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