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page


82page

등 안사람 80여명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거두어 의병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외당은 준비가 완료되자 춘천 진병산과 의암소 및 홍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제천 장담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며 다시 의병을 모집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에 외당은 크게 분노하여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는 없다 하고 1911년에 전가족이 중국 해성현 묘관둔으로 망명하여 의병의 재거를 추진하다가 불운하게도 1913년부터 외당과 의암과 항재가 차례로 도라가니 남은 가족들은 만리 타국에서 의지할 데가 없게 되고 어린 자질들은 여사가 홀로 보호해야 하게 되었다. 더구나 국권회복운동은 중단할 수 없다 하여 돈상 민상 교상 등 세 아들이 이를 계승하기로 하고 음성국 음성진 금민와 및 중국인 장영방 등 18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니 이후 20년간 가정은 여사가 혼자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간의 피눈물 나는 시련은 매거할 수도 없거니와 여사는 그 혹독한 고생도 국권이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데 1935년에 이르러 장자 돈상이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으니 여사의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러 살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사는 재종 시동생 직와장에게 어린 손자들을 부탁하는 서언을 남기고 또 해주윤씨 일생록을써서 자손들에게 후일을 당부한 후 아들이 숨을 거둔 지 12일만인 8월 1일에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 여사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이때에 여사는 수가 76세로서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임시로 이장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여사의 애국활동을 인정하여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또 1990년에는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시켰는데 지역에서는 여성으로 일생을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한 공을 기리고자 1982년 11월 9일에 이상주 강원대학교 총장이 여사의 향리인 춘천군 남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건립하였고 1990년 11월 5일에는 여성단체 예림회에서 춘천시립도서관 정원에 여사의 동상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여사의 묘소는 반세기의 남북분단과 중국과의 교통사절로 실전하였으므로 손자 연익씨가 이를 애통히 여겨 1984년 6월 28일에 부군 항재의 묘비를 세울 때에 여사의 신위를 돌에 새겨 합폄한 바 있었는데 그 후 중국과의 왕래가 가능해졌으므로 금년 7월 15일에 연익씨가 중국으로 들어가 해성시 묘관촌에서 옛날 동지 영수덕 영수곤 진장림 장건평 갈복순 등 중국인을 만나 여사의 묘를 찾으니 이제 여사는 생전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여사는 건국유공자로서 유해의 봉환을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게 되고 또 여사의 안장을 위하여 거도적으로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유해 봉환제전 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전을 집행키로 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금의환향인가! 뿐만 아니라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