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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⑤ 81 년 2월 26일부터 3월 1일까지 4회에 걸친 도쿄대심 원의 최후 공판을 마지막으로 그는 3월 2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4월 5일 무기(無期)로 감형된 뒤, 다음날 지바(千葉)형무소로 이감되어 이곳에서 10년을 넘게 감옥 생활을 했다. 공판장에서 박열은 조선 민족을 대표했다. 특히 사 모관대에 한복을 입었다. 가네코 후미코도 한복을 곱게 입은 채로 나란히 공판에 임했다. 재판장 마키 노 기쿠노스케(牧野菊之助)와의 간단한 인정 심문이 있은 이후 곧바로 비공개로 진행되는 가운데 박열은 일제를 탄핵하는 「일본 권력자계급에 보냄」이라는 법정 선언문을 낭독했다. 여기에서 그는 제국주의 지배 질서를 전면 부정했다. 박열의 재일 활동과 옥중 투쟁의 의미 1923년 9월 3일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경찰 에 보호 검속되면서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계 획한 ‘대역사건의 범인’이 박열이었다. 박열이 천황 제에 비판적이었고 폭탄 입수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리고 박열은 옥중에서 투쟁했다. 그 는 은사(恩赦) 전달에 저항하여 약 10일 동안 단식투 쟁을 했다. 그리고 후세 다츠지를 통해 가네코 후미 코의 죽음을 전해 듣고 슬픔을 단식으로 이어 갔다. 폐결핵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는 옥중에서 지속적으 로 저항했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그에게 어떠한 감형이나 출옥의 조치 도 취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 라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박열을 일본 당국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45년 10월 27일 오후 2시 드디어 박열은 해 방 을 맞이했다. 21세의 청년이 44세가 되었다. 세계 감 옥사상 단일 범죄로 유례가 드문 오랜 기간인 22년 2개월의 감옥생활을 극복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이날 오후 2시 반 “박열 출옥 환영대회”가 아키다 (秋田)현 오오다테(大館) 역전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군중들은 시가지 중심부를 가득 메우고 행진해 갔 다. (본고는 김인덕, 『박열 - 극일에서 분단을 넘은 박애주의자』, 역사공간, 2013을 주로 참조함)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구원, 일본 와세다대 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과장, 성균관대 동아시 아학술원 연구교수, 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청암대학교 교수 · 재일 코리안연구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식민지시 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일본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강제연행사 연구』, 『재 일본조선인연맹 전체대회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한국현 대사와 박물관』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인덕 오오다테(大館)역 앞에서의 박열 출옥 환영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