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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그 후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裕仁)가 일본의 새로운 왕으로 공식 등극하는 의식인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 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의 고또부기(壽) 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수레에 실린채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일 일본에 거주하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오열 속에서 전일본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장례행렬이 십리 반에 달하였다. 당시 선생의 서거 소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1929년 1월 3일 부인 윤상필 여사와 어린 딸 정자, 그리고 동생 서진화군과 함께 선생의 유골을 품에 안고 그리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고이 모시게 되었다. 평생을 민족교육운동과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신 서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