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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회령(會寧) 사람이다.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윤봉춘(尹逢春)·이범래 등과 함께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동료들은 일경에게 피체되었지만, 그는 요행히 탈출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뒤 윤봉춘과 함께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이후 그는 동향의 지우이며 동지인 윤봉춘과 평생 활동을 함께 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윤봉춘·김용국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독립군의 국내진공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나남(羅南)의 사단 본부와 회령 수비대간의 교통을 차단코자 회청선(會淸線) 7호터널 폭파 및 전선절단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는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다. 그러나 1921년 1월 윤봉춘과 함께 일경에게 피체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함흥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영화계로 진출하여 윤봉춘과 더불어 한국의 영화예술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일제하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