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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9월30일 화요일 8 (제225호) 특 집 목조건물(齋舍)화재·해충걱 정끝 보장(AS)5년 조상의얼과혼이담긴목조문화재지킴이가되고자평생을걸었습니다. ㈜ 한 국특 수 불연은모든역량을동원하여방염방충액을개발하여2012년문화 재청으로국내최초KD-500에이어 최근KD-600을한번더인증받았습니다.한번시공으로30년을븣 목조문화재이제화재와해충으로부터안전하게지켜드리겠습니다. 시공문의:대표박용태(밀성박씨 행산공后)010-2514-7175뱚 숭례문 나주향교 수원팔달문 우리 소종중(小宗中)은 밀양박씨규정공후 청재 공파돈암공(휘천부)종중(密陽朴氏糾正公后淸齋公 派遯菴公(諱天扶)宗中)이라 칭하며, 세거지명(世 居地名)을 따라 송림문중(松林門中)이라고도 일컫 는다. 필자가 어렸을 때 세거지인 송림마을은 타성 (他姓)이 몇 세대밖에 없었으며 위계질서(位階秩 序)가있는밀양박씨집성촌이었다. 마을유래는 1500년경 청주김씨(淸州金氏)가 터 를잡아살기시작하면서마을이이루어졌다고전해 오는데 고대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馬韓) 의 장사현(長沙縣-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지 역에 설치된 행정구역)에 속한 땅이었고, 삼국시대 인 백제(百濟) 때 장사현이 상로현(上老縣)으로 개 칭되었다. 신라(新羅)가 삼국통일 후 통일신라 757 년(경덕왕 16) 군현제도(郡縣制度)를 개편할 때 장 사현으로 바뀌게 되었으며,이웃한 무령군(武靈郡-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의 영현(令縣)으로 삼았 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 사현이 영광군(靈光郡)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조선시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 현을 병합(倂合)한 무장현(茂長縣)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1723년(경종 3) 개편한 행정구역명칭으로 ‘무장현상용복면(上龍伏面)송림리’라불렀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무장현이 무장군 (茂長郡)이되어전주부(全州府)에소속되었다가,1 896년 도제(道制)실시로 전라남도에 귀속(歸屬)된 후1906년전라북도로이관되었으며,현재행정구역 명칭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상하면 송곡리 송 림’이다. 마을입구에들어서면그지명에걸맞게사방이산 림향이 짙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고 296.4m인 송림산(松林山)이 진산(鎭 山)이다.좌로는 장사산(長沙山) 좌청룡(左靑龍)이 굽이쳐 다시 안산(案山)을 일으켜 수구(水口)를 막 아 비봉(飛鳳)마을에 이르고, 우로는 건지산(乾止 山)이 뻗어 백호(白虎)가 되어 그 줄기가 장기(壯 基)마을에이른다. 송림산에서발원한맑은물이흘러송림마을동쪽 에 있는 송림제(松林堤)에 담수(湛水)되었다가 송 림천(松林川)을 따라 장기마을 앞에 있는 송곡저수 지(松谷貯水池)로흐르고있다. 마을입구에는 긴 세월 흐르면서 고사(枯死)해 모 습을 감춘 수백 년 된 세 아름드리 노거수(老巨樹) 왕버들나무네그루가마을의수호신처럼위용을자 랑하며 우뚝 서 있어 주위의 경관과 잘 어우러져 풍 광(風光)이 수려(秀麗)했었다. 이러한 풍광과 더불 어 청정지역(淸淨地域)의 맑고 청아(淸雅)한 숲 향 기와초가(草家),장독대,해 질 녘 굴뚝 연기가 어우 러져고즈넉하게옛멋스러움을지닌마을분위기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었는데,지금 은초가집터에양옥이나기와집으로신축되고개량 해옛정취(情趣)를찾아보기어렵게되었다. 촌락(村落)이 조금씩 떨어져 그 지형특성에 따라 큰동네·양지촌(陽地村)·터안·서당골(書堂谷)·봉 강(鳳崗)·와등(瓦登)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농업을 주 소득원(所得原)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오락TV프로‘삼시세끼’고창편촬영장소로알려져 방송후찾아오는여행객들의발길이잦다고한다. 필자의 12대조 휘(諱) 천부(天扶) 선조께서 조선 조선조(宣祖)말엽에전라북도완주군용진읍신지 리용복(龍伏)마을(당시전주(全州))에서출생하시 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에 가담 한 후, 혼란한 시기에 세간영화(世間榮華)에 뜻이 없어 1650년경 송림마을을 찾아 산하(山河)의 풍치 (風致)에 매료되어 입향하시고 전원에 은거하셨다. 서숙(書塾)을 열어 후생강학(後生講學)에 진력(盡 力)하신 후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15대에 걸쳐 세거 한지370여년의세월이흘렀다. 후손 중에서 9세손 휘(諱) 규진(奎鎭) 선조와 관 련한문헌(文獻)을살펴보면,1868년(고종5)2월당 시 정읍에 소재한 고암서원(考巖書院)의 유생 유관 진(柳觀鎭) 외 24명이 무장향교(茂長鄕校)에 보낸 통문(通文)에 의하면 ‘무장현(茂長縣)의 사인(士 人) 박규진(朴奎鎭)의 효행사적(孝行事績)을 감영 (監營)에만 알릴 것이 아니라 예조(禮曺)를 통하여 임금에게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도록 하자’고 요청 한 내용이 게재되었고, 1876년(고종 13) 호적소(戶 籍所)에제출한고문서인호구단자(戶口單子)가남 아있는데그내용인즉‘무장현상용복면(上龍伏面) 송림리(松林里)에사는유학(幼學)박규진(朴奎鎭) 이 당시 아내 이씨(34세)와 아들 내외,40이 넘은 동 생심진(心鎭)부부와함께살고있었으며노비를소 유하고있었다.’고한다. 1945년(乙酉年) 3월, 후손들이 선조의 효행을 기 려 송림마을 앞 대로변에 비각(碑閣)을 짓고 ‘존효 당박공효행비(存孝堂朴公孝行碑)’를 세운 후 그 효 (孝)와 지절(志節)을 숭모해왔으며, 그간 후손들은 선조들의뜻을받들어세거지를소중히지키면서영 농인(營農人)으로,또한국내외각지에흩어져공무 원·법조인·금융인·의료인·회사원·교육자·사업가 등다방면에걸쳐각자의삶에충실하면서명문가의 전통을이어가고있다. 필자가이마을에서한국전쟁중에태어나73년이 지났고 출향(出鄕)한 지도 60년이 되어가니 참으로 많은세월이흘렀다. 어린시절에는많은사람들의형편이참으로궁색 했었다. 3년에 걸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피비린 내나는전쟁후휴전으로평온을찾은지얼마되지 않은세거지마을은초가집40여호에260여명의주 민이 거주하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마을공동체였다.지금은세대수가⅓정도로줄었고 그중 ⅓에 가까운 세대가 노인 홀로 고향집을 지키 고 있으며 거주하는 주민의 숫자는 1/7 정도로 줄어 들었다.60대 이하 젊은이들은 몇 안 되고 그들은 마 을이장·부녀회장 등 어려운 일을 도맡고 있어 오늘 날대한민국농촌의어려운현실을말해주고있다. 당시 남자들의 전유물(專有物)처럼 여겼던 마을 입구 정자(亭子)는 마을의 공용 건물로 마을공동체 회의장이었고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거나 휴식을 위 한 쉼터였다. 공동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물도 긷고 빨래도 하며 채소를 씻으면서 소통하는 공간이었으 니그모습이정겹기만했었고공용시설을유지하고 보수하는 작업은 울력을 통해서 해결했다. 지금은 경로당이들어섰고공동우물대신상수원의물을끌 어와 수도꼭지를 틀면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 고있으며,마을에서4㎞정도떨어져면소재지에있 는초등학교까지도보로오고갔던등하굣길이확장 되고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정기버스노선이 생겼고, 고향을 방문하는 후손들이 승용차를 이용하는데 편 리해격세지감(隔世之感)이있다. 그때는 인심이 후해서 식사 때 이웃이 방문하면 함께 식사할 정도였고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보여 왔던노동의교환방식인두레나품앗이로농업에종 사해 소득은 적었으나 행복지수가 높았던 시절이었 다. 가정마다주식은쌀을조금씩넣은보리밥이나조 밥이었고점심으로는구황식물인감자나고구마,옥 수수를 쪄서 동치미와 곁들여 끼니로 때웠다. 천렵 (川獵)하기 위해 족대를 들고 시냇가에 나가 붕어· 송사리·버들치·새우를 잡아 민물매운탕을 끓여 먹 었었고 겨울철 수렁논 흙 속에 깊이 겨울잠을 자는 미꾸라지를 잡아 시래기나 우거지와 함께 가마솥에 넣고 추어탕을 끓여 먹었었는데 그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은 명 절에나먹었었고방계(放鷄)한닭을잡아만든음식 은 어르신 생신이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먹었으니 참으로귀한식재료였으며,적정한영양을고려해서 음식물을 섭취(攝取)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천수답(天水畓)이 많았던 터라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다랑논과 비탈진 밭을 경작할 때 는소와쟁기의힘을빌렸고삽과곡괭이·호미·쇠스 랑·도리깨 등을 이용한 재래식 농법에 의존해 힘은 들었지만,친환경적이었고 행복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논에모내기후마지막김매기(만도리)를마 치고 나면 주인은 등판에 흙손바닥 도장이 찍힌 적 삼을입고일꾼들이끄는 소 등 위에 올라탄 후 흥겨 운 농가(農歌)소리에 맞추어 귀가했고 아낙들은 시 간맞추어닭죽을끓여대접하기에바빴다. 소년들은 하교 후 귀가하면 검정 고무신을 신고 소꼴을 먹이기 위해 소를 몰고 꼴을 찾아 산과 들로 나섰고, 든든히 배를 채운 소의 고삐를 붙잡고 집으 로 돌아올 때의 흐뭇했던 기억이 뚜렷하며 땔감을 구하고 소꼴을 베어 오기 위해 지게를 지고 나설 때 의모습이참으로새롭기만하다. 농번기인수확철이되면어린자녀들까지도휴일 이나 방과 후에는 낫을 들고 논밭에 나가 벼 베기와 보리 베기 작업을 도왔으며, 농한기인 겨울철에는 새끼 꼬고 가마니 짜는 일까지 했으나 형제간에 누 구하나불평하는사람없이당연한일로여겼다. 당시농가(農家)에서길쌈한마포(麻布-삼베)·모 시(苧)·명주(明紬-명주베)·면(綿-무명베)과 같은 천들은 촉감이 좋고 땀과 수분을 잘 흡수하며 통풍 이 잘되는 천연의류소재였다. 이 천으로 곱게 바느 질해서 만든 한복(韓服)차림을 한 어르신들이 장죽 (長竹-단단하고 가느다란 대나무와 은(銀)으로 만 든 곰방대)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시면서 직접 재배 한엽연초(葉煙草)를칼로썰어곰방대끝에엄지손 가락으로 꽉꽉 눌러 채운 후 불을 붙여 흡연을 마치 고 나면 장죽을 재떨이에 딱딱 소리 나게 치면서 담 뱃재를털어내시던모습이눈에선하다. 명절이 되면 전통놀이(농악·강강술래·불꽃놀이· 제기차기·이어달리기·연날리기·자치기 등)로 흥을 돋우고 마을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 며, 특별히 설날이 되면 종가(宗家)는 물론 가가호 호(家家戶戶)방문해서 어르신께 세배 드리고 음식 과 과일을 대접받았다. 경조사가 있을 때는 마을 사 람들이만사(萬事)를제겨놓고일을당한가정에계 란꾸러미 하나,밀가루 한 되,쌀 한 되등을부조(扶 助)로 전하고 함께 장만해서 먹고 마시며 함께 기뻐 하고함께슬퍼했다. 특히환갑잔치가있는날에는멀리있는지인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하루 내내 참석해서 먹고 마시 며가무(歌舞)를즐겼다.상(喪)을당했을때는주민 들이 관(棺)과 꽃상여(喪輿)를 손수 만들어 장례를 치러주며 위로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고 상주 (喪主)는예를갖추어대접했다. 연중제일큰종중행사였던시제(時祭)때가되면 세거지 마을에 사는 후손뿐만 아니라 타지에 나가 살고 계신 지손(支孫) 어른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옷을 깨끗이 차려입은 후 설레는 마음을 안 고세거지에서멀리떨어져산재(散在)해있는조상 들의 유택(幽宅)을 찾아 격식을 갖추어 홀기(笏記) 에 따라 묘제를 지내고, 함께 식사하며 이름과 항렬 (行列),나이를묻고위계(位階)를따져인사하며담 소(談笑)하기에바빴으니이또한종친간에소통하 는시간이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종중의 위상(位相)을 엿볼 수있는자리가되었으며,선산(先山)과위토(位土) 를 관리하며 묘사(墓祀)의 제수준비(祭需準備)를 위해수고하시는분이준비한떡과고기·생선·전·과 일이 든 꾸러미를 하나씩 손에 들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하던추억이뇌리를스친다. 4년 전 종중회의에서 결의한 후 산재(散在)해 있 던 선조들의 묘소를 한 곳으로 이장해 통합묘역을 조성하고 주차장까지 완비해 매년 3월 셋째 토요일 11시에 시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날은 원근각처(遠 近各處)에서 참석한 종친들이 반가운 얼굴로 안부 를 묻고 격식에 따라 시제를 마치고 나면 점심을 함 께한 후 종중총회(宗中總會)를 열어 1년 동안 운영 한 종중제반사(宗中諸般事)를 보고받고 새로운 안 건 등 종중사를 논한다. 이를 진행하는 임원들의 일 처리 과정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위선사 (爲先事)를바라보는종친들의모습에서자긍심(自 矜心)을 엿볼 수 있다. 1960년대에 산업화시대(産業化時代)로 접어들면 서부터자식들은가난을벗어나기위해일자리를찾 아 도회지로 떠나갔고, 못 배워 한 맺힌 부모님들의 뜻에따라유학(遊學)길에오르다보니그길이어쩌 다가 돌아오는 고향길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은 세상을 하직(下直)하고 자 식들은 귀향(歸鄕)하지 않아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 력이 부쩍 줄어들고 노쇠한 형편에 처해 영농이 어 렵게 되었다고 한다. 시대적 요청으로 경지정리 되 고현대화된농법과현대화된농기계를이용한영농 을 한다고 하나 외국에서 들어온 인력이 아니면 농 사짓기가 힘들다고 하며 아우성친다. 적지 않은 임 금을 지불하고 나면 농사를 지어도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푸념에이해가가고도남는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세거지에 거주하는 성손 (姓孫)들이예전에비해많이줄어들고있는형편이 다. 타성들이 귀촌(歸村)하고 외국인들이 이주(移 住)하게되면먼훗날세거지의모습이많이바뀔것 만 같아 종중의 상징인 재실(齋室)과 세거비(世居 碑)만이밀양박씨집성촌이었음을응변(應辯)할것 같다. 사회변천에 따라 핵가족시대가 확산되어 자녀출 산이 적고 잘못된 교육(가정·학교·사회)의 산물(産 物)로 이기적인 생각이 만연(蔓延)해 명절이 다가 오면 국내외 관광지로 여행 떠나기 바빠 웃어른을 찾아뵙는일에나친척경조사와종중행사에참석하 는일에관심이적어졌다. 옛날과달리사촌만벗어나도친척들을잘모르는 경우가허다하고족보편찬하는일에도관심이없는 경우가 더러 있어, 종중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이 많아 향후 우리 종중뿐 아니라 많은 종중의 숙제 (宿題)가 될 것 같다. 상기 상황들을 정리해 볼 때, 세거지가 예와는 다 른모습으로흔들리고있고종중의존속이위태로워 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 (恥部)하기에앞서후대의일은그들에게맡기되우 리 박씨대종친회의 종강삼시(宗綱三是)인 숭조(崇 祖)·애종(愛宗)·육영(育英)의 정신을 마음에 굳게 새기고 명문(名門)의 전통을 소중히 지켜나가길 소 망한다. ※참고문헌 고창의마을유래(고창문화원.2003) 무장현지역조사보고서(전북역사문화학회.2009) 밀양박씨청재공파돈암공세보(밀양박씨청재공파돈암공종 중.2010) 밀양박씨규정공후청재공파遯菴公(諱天扶)종 중세거지송림마을 박종훈(규정공파25세손) 세거비와존효당효행비,전북 고창군상하면송곡리227 1960년초송림마을모습 존효당(휘 규진)공의 효행비각(1945. 3. 건립) 도로개설로 인해세거비와함께 2000년다시세웠다. 묘원,고창군상하면자룡리3-5 선영봉사와후손들의구심점역할을하고있는추모재(201 1년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