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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6월30일 월요일 8 (제222호) 특 집 눌암공의6대손이고,운포공(휘순)의현손인광학(光鶴)의 改諱는 광학(光學) 字는 학노(學魯), 호는 경운(耕雲)으로 통 훈대부 군자감정을 지내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된 휘춘빈(春彬)의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대범하여 용력이 뛰어났다. 1780년(정조4) 7월 13일(己丑)대궐(시민당,時敏堂)에불이났다.아무도접근하 지 못할 때 公이 50근이 나가는 서까래를 메고 들어가 담장에 걸쳐 놓고 이를 이용해 들어가 화재를 진압하였다. 이는 충의 (忠毅)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7월 13일 시민당에 화 재가발생한후조정에서는임시행각을건립하였으나시민당 (時敏堂)을중건하는공사를특별히그만두었다. 정조4년경자(1780)8월29일(을해)양력1780-09-27전교하 기를“시민당을고쳐짓는것은일의체모가중대하니,어찌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마침 흉작을 면하여 해서(海 西)와 호서(湖西)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는 것은 실로 몹시 어려우니, 우선 나무 한 그루를 베거나 재목 하나도 운반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막아서 가리는 일이 시급하 여행각(行閣)을 대략건립하였다고하니,손질하여 단장하는 것은 내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라. 해서와 호서에서 재목을 베 는 일은 다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하고, 비변사 낭청을 보내고차원(差員)을정하는등의일은모두그만두도록하라. 지금행각은이미기와를덮었지만시민당은언제쯤에나공사 를 시작할지 모르니, 중건도감(重建都監)을 없애라.” 하여 끝 내중건하지못하였다. 한편공은어머니가병환이있어퇴직하여돌아와농사를짓 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여 충신효자라 칭송이 자자 했다.암행어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그 사실을 올려 임 금에게는 충성을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는 효자로 확인되어 통정대부병조참의에추증되었다. 공(公)은강직하고깨끗한지조가있었고충성과효를다했 다는소식을들은사람은감동하지않은사람이없었다. 주(註) 시민당(時敏堂)은 세자의 외당(外堂)으로서 청정과 조참을 행하 는곳으로화재이후흉년등의이유로저승전과마찬가지로다시중건되지 못하였다.대신하여정조6년세자궁으로서븮중희당븯을새로세웠다. 박시언의 초휘는 시연(時淵) 개휘는 시언(時彦)으로 字는 정도(正道)이다.눌헌공의6대손이고경와공(휘련)의현손으 로경주김씨는그의부인이다. 경주김씨는 어려서부터 친정 부모님 섬기기 지극정성으로 하였으며 시집오기 전부터 효녀로 칭송이 자자했다. 시집 온 뒤에 시부모를 섬길 때는 더더욱 공경한 마음 을 쏟았고 맛있 는음식을먼저드리고아침저녁으로구들을살피며추위여부 를묻는문안인사를빠뜨리지않는등며느리로서도리를다했 다. 시부모께서 40리 먼 데 있는 종가를 찾아 길을 나섰는데 마 침 눈이 많이 와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해 오는 도중에 누워버 렸다.이에 그 다음날 비로소 소식을 듣고 며느리가 직접 가서 시아버지를찾아업고집으로돌아와사경을헤매는시아버지 를위해백방으로수소문하여약을구해4년동안극진히간호 했다. 그러나 치료 도중 등창이 나 그 부위에서 벌레가 나오게 되 었는데 경주김씨는 상처부위 를 입으로 빨아 8년이란 세월 을 더 살아 도합 12년을 더 살 고결국시아버지는세상을떠 나게 되어 애통해 하며 3년간 영위를모시며살았을때와똑 같이하였다. 이어찌하늘이내린효부가 아니겠는가. 이에 고을 주민들이 아름다 운 행적을 묻혀버리지 않도록 하려고그사실을들추어서감 영에아뢰어포양을받았다. 열부연일정씨는어려서부터밝고심성이곧아부모에효도 하는효녀이다. 성숙하여 눌암공의 8세 광년(光年, 충신 광학의 제종 동생) 에게시집왔는데남편광년은얼마지나지않아곧병을얻어1 0년간극진히간호하였다. 하늘에빌며대신데려갈것을애원하였으나얼마지나지않 아 남편이 돌아가심에 아녀자의 몸으로 3년의 시묘 살이를 하 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복자를 정성스럽게 양육하였으나 결국 아이마저세상을떠세인들이안타깝게여겼다. 열부연안김씨는박용하의부인이다. 충신효자의가문에서태어나시집와시부모님을섬길때매 우조심조심하였고,서방님을공경스런마음으로섬겨며느리 와아내의도리를다했다. 그 뒤 을묘년에 남편이 희귀한 병을 얻어 살아 있는 꿩고기 를 먹고 싶어 해 겨울에 꿩을 잡기란 매우 어려워 마음이 타들 어가고초초해하늘에축원하였는데다음날아침에갑자기꿩 한마리가 날아들어 닭 장안에 들어가 그 꿩을 잡아 봉양해 병 세가좋아졌으나재발하여누차약을써도효험이없어하늘에 빌며 천한 목숨을 대신 잡아가라며 100번이 이상 축원하였으 나운명직전에이르러단지하여피를흘려주어운명했던목숨 이다시살아나2일을연명토록하였다. 부인께서피눈물을흘리며서방님뒤를따라죽으려했으나 시부모가 붙잡고 죽어서는 안 된다며 “만약 죽으면 늙은이들 이 누굴 의지 하겠느냐”는 간곡한 당부에 부득이 죽지 못하고 생명을부지하면서조석으로상식을하고통곡하였다. 부모님 봉양에 정성을 다하고 남편의 산소를 매 삭망 때 마 다성묘하는등이를비바람에도멈추지않았다. 이에이웃마을사람들도감동해하지않은사람이없었다.특 히 남편과 시부모가 돌아가신 14년 동안 머리 빗질도 아니 하 며애도했다. 산골짜기에서가난하게사는사람이이와같이특이한열행 이있었으니이런사실을발표해야되겠기에열부정려를세웠 다. 박용하의 字는 문일(文一),또다른 이름은 용호(龍鎬)로 충 신박광학의손자로추정된다. 2015년(乙未) 발행된 눌암공 파보를 낱낱이 흩어보아도 박 용하라는이름은없고또한연안김씨는박용호의부인밖에없 다. 그리고행장에도있듯을묘(乙卯,1915)에남편이희귀한병 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박용호의 사망일이 1915년 4월 10일 로일치한다. 이에 종중에 이를 확인하였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산골짜기에서가난하게사는사람이이와같이특이한열행 이있었으니이런 사실을 발표해야되겠기에열부정려를세 웠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아마 족보에도 이 사실이 누락되 었을것으로추정해본다. 시부모님을섬길때효성이지극하였다. 눌암공의 10대손 구호(龜鎬)와 혼인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남편이병환을만나조석으로하늘에기도하며서방님대 신나를잡아가주세요라고축원하였다.그러나남편이돌아가 시자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으며,그 뒤 시부모를 섬길 때 이 전보다몇배더효성을쏟았다. 그리고유복자를잘가르쳐남편의뒤(문호)를잇게하여그 사실을 손자 재근이 기록을 들추어 정려하게 되었다. 손자 재 근또한효자로동몽교관에증직되었다. 형제간침중하고말이없이차분하게성장하였다.어버이를 섬길때효성이지극했기에많은사람들의흠모를받았다. 시골에살면서어머니김씨가담이끓어병세가깊어그동안 간호를 잘했고 어버이 뜻에 순종을 해 의원이 생 목혈을 마시 면살아날것이다는말에하느님에게밤낮으로축원했는데18 92년(壬辰)12월이다 때마침큰눈이내려오고갈수없었는데갑자기사슴두마리 가 내려와 이를 잡아 피를 빼 마시도록 하고 고기는 요리하여 드리고뼈는푹고아드렸다. 이후 병세가 좋아져 모두가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이 내린 큰 효자라칭찬하고옛날왕상과맹종주에버금가는효행이라칭 찬하였다.이에암행어사가추천하여극찬의비답을받았으니 누가흠모하지않으랴. 밀성박씨 삼강포정각(朴氏三綱褒閣)의 충신 효자, 효부 열 녀는눌암공(휘계립)의후손이다. 눌암공은밀성대군후사문진사공의후예이다.눌암공의상 계를 보면 17대조 사문진공의 휘는 원(元)으로 고려 사문진사 이고, 밀성대군 후 12중조 중의 한분이다. 10대조 정재공의 휘 는 의중(宜中)으로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불사이군의 충절 을지켰다. 초휘(初諱)는실(實),字는자허(子虛)요,諡號는문경공(文 敬公),아호(雅號)는 정재(貞齋)이다.공민왕 11년壬寅(1362) 10月에문과장원으로발탁되어전의직장헌납사예를거쳐예 문관제학을 역임하였다.이때 공민왕 16年 丁未(1367)년 성균 관이재건되어이색(李穡)이 大司成이 되어경학에통달한정 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 中)이숭인(李崇仁)등에게 성균관 교관을 겸직(兼職)시키었 다.그때 儒生들의 경학질의(經學質疑)에 對하여 정밀하고 소 상한해답은정재先生이으뜸이었다고한다. 고려우왕(禑)14년戊辰(1388)5月에先生이國書인철영위 철폐(鐵嶺衛 撤廢)에 관한 진정전(陳情箋)을 받들고 명나라 에 들어갈 때 행장(行裝)이 검소하여 요동진무(遼東鎭撫) 서 현이先生의청고함에감복하여이사실을례부에告하니황제 는듣고국빈례(國賓禮)로대우하고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 를 잠재웠다. 이를 두고 陽村 권근(權近) 先生은 先生을 祭祀 하는 글에 봉사위난(奉使危難) 악절불투(握節不 ) 승수제 칙(承受帝勅) 복아판도(復我版圖) 철령이북(鐵嶺以北) 위국 오구(爲國 졸 區) 공대불벌(功大不伐) 안어퇴휴(安於退休)라. (나라가 위급할 때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황제 칙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판도를 회복하여 철령이북은 나라의요지로다공로가크고중해도자랑하지않고나아가고 물러감을 편하게 하셨도다)하였고 大司成 김복한(金福漢)이 撰한 신도비명에서 수침철령립위의(遂寢鐵嶺立衛議)하고 려 조봉강지득완(麗朝封彊之得完)은 선생지력야(先生之力也) 라.(드디어 철령위 세우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고려의 강토를 완전하게 함은 선생의 힘이라 하였다)하였으며 星湖 이익(李 瀷)先生은성호사설(星湖僿說)에븮忠臣忠臣이여박의중(朴宜 中) 先生이 아니었다면 고려의 령토가 어찌 완전하였으랴븮라 고적었다. 고려 允王元年己巳(1389)에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 으로 책봉되었고, 고려 간성왕(杆城王) 二年 庚午(1390) 正月 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종2 품)가되었다. 후에예문관제학겸성균관대사성에임명되었다가곧이성 계(李成桂)의 혁명으로 고려는 망하고 이씨혁정당시(李氏革 正當時) 즉 1392年 10月에 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지병이 있어 숙부인 간의대부公(仁翊)과 더불어 전라북도 김제로 퇴둔하 여 후학을 가르치시며 두문자정(杜門自靖) 하니 조선조 태종 이 사방으로 찾아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 議政府事)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忠節을지켰다. 정재공은 아들 5형제를 두었다.경문(景文),경무(景武),경 빈(景贇),연(衍),행(行)으로셋째경빈은문과급제하여이조 참의이고이조판서에추증되고밀원군(密原君)에봉(封)해지 진눌암공의9대조가된다. 밀원군의증손휘서창(緖昌)은문과부사이고그의손자사 곤(士昆)은백의종사(白衣從史)이다. 백의종사에천거된기록은전해지지않으나족보에‘나라의 난세를 당하여 백의종사(白衣從史)에 천거된 바 있으나 끝내 과거에는응하지않고성리학에만전심하였다.’라고전해져난 세에선비로서의역할을충실히하였지않나생각해본다. 백의종사공의아들은원호(遠浩)이고손자는종경(宗京)으 로눌암공의조부로생원이다.아버지지봉(芝鳳)의호는돈수 (遯쑴 )이다. 1632년(壬申)에 오랑캐들이 침입할 것을 미리 짐 작하고 김제에서 삼척으로 이거하여 성리학을 널리 공부하고 경서의뜻을탐구하며후학양성에매진하였다. 아들 눌암공의 휘는 계립(啓立) 자(子)는 성천(性天), 1620 년(광해12)2월 29일 전북 김제 흥복동에서 태어났다. 총명하 고재주가뛰어났으며,아버지돈수공과어머니남원양씨를모 시고소달산아래로이거하여어려운살림에도부모님섬김에 소홀함이없었다. 25세에아버지돈수공이돌아가시자몸이심하게여위고수 척해질 정도로 슬퍼한 것이 제도에 지나칠 정도로 하였고, 묘 자리를아직정하지못해밤낮을울부짖으니밤에꿈속에서노 인이 나타나 마을 뒤 두수곡에 쓸 만한 묘가 있다고 손짓을 하 여 새벽에 일어나 가보니 그곳에 사슴 한 마리가 누워 사람을 바라보고 서서히 일어나 간 즉,사슴 누워있는 곳에 가보니 눈 이녹을정도로따뜻하였기에인하여그자리를묘자리로얻게 되었으니어찌정성과공경이사슴을감동시키는효도가아니 겠는가. 10년후어머니초상을만나서염을하는절차에몸이수척하 도록서러워하는지극함이이전아버지초상때와같았고아버 지묘옆에부장(附葬)을하였다. 5년 후 지금의 옥계 북동으로 이거해서는 농사를 지으며 목 은 이색이 지은 정재기를 읽고, 선조의 유훈을 되새기며 아버 지돈수공의뒤를이어후학을가르치는데매진하다숙종癸亥 (1683년) 향년 64세의 일기로 운명(殞命)하였으며, 순조 정해 (丁亥,1707년)효행으로통훈대부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 正,정3품)에추증되었다. 눌암공은 전북 김제시 흥복동에서 태어났다.1636년 병자호 란이 일어나기 4년 전 1632년 이를 미리 예측하고아버지를모 시고강원삼척으로세거지를옮겼다. 강원도 삼척시 소달산(소달면, 현 도계읍) 아래로 이거 한 후아버지돈수공은훈도로후학양성에매진하였다. 5년후 지금의 옥계 북동으로 이거해서는 농사를 지으며 목 은 이색이 지은 정재기를 읽고, 선조의 유훈을 되새기며 아버 지돈수공의뒤를이어후학을가르치는데매진하며옥계문중 의문호를열었다. 옥계문중은 입향조의 호(號) 눌암(訥菴)을 따 눌암공파라 한다. 눌암공의 아들 유봉(裕奉)의 초휘(初諱)는 유복(維馥), 字는 혜곤(惠昆), 호(號)는 척당( 홋 堂), 수직(壽職)으로 통정 대부공조참의에증직되고아들연( ), 명(蓂), 혜(蕙), 수방 (守邦),순(蕣)등5형제를두면서크게번성하여장남연의號 는 경와(耕窩),수직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증직되고후손 들은 경와공파(耕窩公派)라 하고, 차남 명의 호(號)는 가헌 (稼軒)으로가헌공파,삼남혜의호는목계(牧溪)라하여목계 공파,사남수방의호는서곡(鋤谷),수직으로가선대부한성부 좌윤에 증직되고 후손들은 서곡공파,오남 순의 호는 운포(耘 圃),수직으로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고운포공파로세계를 잇고있다. 효자집안에 효자난다고 하였다. 눌암공이 효행으로 통훈대 부군자감정에증직되었듯후손들또한효자효부열녀열부가 줄을 이어 충신, 효부, 열부, 효열부, 효자 정려가 내려졌으니 우러러 본받을 만큼 덕이 있는 가문으로 지역에서 그 명성이 이어진다. 뱚효열부열전 밀성박씨삼강포정각(朴氏三綱褒閣 ) 강원특별자치도강릉시월호평동502-3 강릉에서옥계방면국도변에있다.강릉비행장 입구에서 남쪽 방향 200m지점에 있는 밀성박 씨 삼강포정각(朴氏三綱褒閣)은 선조의 충·절· 효를기리고,그정신을본받으려는정성으로1 949년(기축己丑)에관계후손과종의(宗儀)가있 어 효열부 인동장씨(박구호의 처)의 손자 동몽 교관 박재근의 주선으로 목재를 벌채(伐採)하 여다듬고기금을모금하여비를세우고비각을 건립하였다.이에후손들은삼강포정각을수호 하기 위해 1971년 삼강회(三綱會)를 구성하여 보수 등 수호에 앞장섰고, 1984년 도로개설과 함께 전국효열기념시설물정비추진계획에 따 라 현 위치로 옮겨 국비로 보수하여 지금에 이 른다. 이 비각은 밀성(밀양)박씨 사문진사공 후예인 박광학(朴光鶴)의 효행과 내수(來壽), 내익(來 翊)형제의 효행과 박시언(朴時彦)의 처 경주김 씨(慶州金氏),박광연(朴光年)의처영일정씨(迎 日鄭氏),박구호(朴 鎬)의 처 인동장씨(仁同張 氏),박용하(朴龍河)의처연안김씨(延安金氏)의 정열을기리기위하여건립된것으로최근강릉 시에서보수를위해후손을찾았으나어려움이 있어 본보에서 주선하여 행정당국과 연락되어 조만간보수할예정으로있어이들효자열부와 함께눌암공종중을함께소개해본다. 밀성박씨삼강포정각과 비석 충신(忠臣) 박광학(朴光鶴) 삼강문,옥계면북동리덕우재앞 효부박시언의처(朴時彦妻) 경주김씨(慶州金氏) 열부박광년의처연일정씨 열부박용하의처연안김씨 효열부인동장씨박구호부인 효자박래수·래익형제 선원세계 눌암공신도비(강원강릉시옥계면북동리262) 눌암공파의세거지변천 덕우재,옥계면북동리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