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2024년12월31일 화요일 8 (제216호) 송년 특집 우리 종친회에서 박재동 회장님을 떠올리는 수식어가 있다.‘국 수회장님’이다. 이는 각급 행사장에 사은품으로 국수를 무상제공 하면서 생긴 언어이다. 경남 산청군 종친회 한마음대회, 밀성(밀 양)박씨화합한마당전진대회등경남일원의행사장한편에는동 명식품의‘옛날국수’가있다. 동명식품은오뚜기식품에옛날국수(OEM,주문자의상표로내 놓는 상품)로 전량 납품하고 있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TV드라 마‘백년의유산’촬영지이기도한동명국수는지난11월11일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그리고 이날 박재동 회장은 유명한 어 록을 남겼다. “부채가 있는 대표는 오늘 당장 골프채를 도끼로 꽉 부셔라”이는골프장에가는시간에근로자들과함께어울리며소 통하여불량을줄이는등기업운영에충실해라는것이다. 동명식품은 부채가 없는 회사로 유명하다. 박재동 회장의 경영 철학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이에 새해 종친기업 모두가 부 채제로에도전해보길염원하며박재동회장을소개해본다. 박재동회장의호는조 원(晁園)이다. 경남 산청 군신안면외송리에서아 버지 휘 의상(義尙)公과 어머니 담양전씨 복호 (福好)여사의 장남으로 1935년 태어나 신안주씨 재순(在順)여사와 사이 에 3남 2녀를 두었다. 예 (禮)와 도덕(道德)을 숭 상하며 탁월한 추진력과 부지런함으로 일관하여 1974년 주식회사 동명식 품을설립중견기업으로성장시켜동남권제일의국수생산업체로 TV연속극 ‘백년의유산’촬영지가 되는 등 업계에서도 두각을 보 였다. 특히 탁월한 지도력은 산청초등학교. 진주남중학교 동창회 장을 비롯 사회단체장으로 이어졌으며,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 정받아 진주시장, 진주세무서장, 경상남도의 성실납세자 유공자 표창,국세청장,기획재정부장관겸부총리의표창을수상했다.20 10년 종친회장으로 추대되어 5회에 걸쳐 연임하는 동안 회관건립 에앞장서2억7백만원을헌성함으로서관내670여세대종원들의 동참을이끌어내7억여원을모금하는계기가되었다. 경주 시조대왕의 춘추항례와 종중의 연례행사인 한마음축제에 관광버스 55대,국수 4천여박스,읍면분회 식대 1천5백만 원,박씨 종친회경남본부 회관건립성금 1천만 원 등 거액의 특연금을 헌성 함으로서 박씨산청군종친회가 전국에서 제일가는 모범종친회로 우뚝설수있었으며,이는본보에서제정한제1회대한민국박씨지 도자대상, 밀성박씨전국청년회에서 제정한 자랑스런밀성인상으 로이어졌다. 박재동 회장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났다. 이때는 일제 이 식민지 수탈과 민족 말살이본격화 된 시기였다.그럼에도 집안 은비록넉넉하지는않았지만 일꾼서 너명을두고 대규모 농사를 지은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넓은 마음만큼 이나 베풀기를 좋아해 ‘적선지가필유여경’을 실천하며 주위 분들 에게도신망이두터웠다. 인근의지품초등하교대신산청읍내에있는산청초등학교를다 녔다.왕복16㎞를걸어다녀야함에도뜻을굽이지않은근성은지 금에그를있게한원동력이아닌가싶다. 그러나해방을맞은지1년2년여의투병끝에아버지가돌아가 시는 큰 불운을 겪는다.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진로를 고심하던 중진주에사는 큰누이의 제안으로 진주시신안동을거처를 옮겨 1950년진주농립중학교에입학하게되었다.그리고이듬해진주농 립중학교가진주남중학교로분리되어개교함에따라이후진주남 중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모나 지않은품성덕분에교유관계도잘유지할수있었다.물론여기에 는 어머니 전복호 여사의 남다른 정성으로 뒷바라지 해준 덕분이 기도 하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한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 전쟁은참혹했다.탄약을운반하는일,부상당한환자를옮기는일 등 징집은 생사를 초월한다.이에 산청의 둔철산으로 어머니를 모 시고 몸을 피하면서 모면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개시되면서 집 에 내려왔지만 집은 가재도구를 비롯한 모든 살림살이는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이는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그의 집 을 본부로 삼았기 때문이다.망연자실 해 하는 어머니를 다독이며 본래집에서조금떨어진곳이집을마련하고일꾼한명과함께농 사를 짓기 시작했다.어머니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열일 곱 살이 견뎌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자연히 공부는 생 각조차할수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의 자형이 올라왔다.어떻게든 학업을 이어 가야한다는설득에고심끝에자형의말에따르기로하고평소알 고지내던초등학교선생님에게자신의뜻을전하고,1년여를공부 한 끝에 중학교 시험을 통과한 그는 19살이 되던 1953년 진주남중 학교졸업장을취득할수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서부경남의 명문으로 불리는 진주고등하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갈수록 어려워진 가정형편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수입이전혀없는상태에학비를조달하면서남아있던물건 들을하나둘팔아가면서생계를이어간것이었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의 선택지는 군 입대 뿐이었다.그 러나 홀로계신 어머니를 두고있기에 선뜻결정을내리지 못하고 소일거리로 두 해를 보내던 어느 날 부선망(父先亡) 독자는 스물 세살까지입대를연기할수있고복무기간도6개월로단축된다는 사실에 다소 위안이 되었으나 여전히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이에 혼인을 결심했다. 어머니 옆에 아내가 있으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때문이다.1959년1월24일지금도그림자처럼함께하며행복 을나누는아내주재순여사와결혼을하게되었다.그의나이스물 다섯,아내는스물둘이었다. 그러나 혼인후입대를준비하는과정에 부선망독자의단축 복 무혜택은 만61세 이상이 홀어머니를 둔 경우에 해당되는데 당시 어머니는60세였기에당황하지않을수없었다. 결국결혼석달 만에논산훈련소를거쳐강원도 화천군사창리 에위치한9사단30연대에서2년6개월간의복무에들어갔다. 1961년12월무사히전역한박회장은군생활과제대후얻은첫 딸의양육등눈에띠게축이난가산은항상가장의어깨를짓눌렀 다.이에부산으로가일자릴구해보았지만어려웠다.가진거라곤 고등학교 졸업장뿐인 그에게 세상을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 다.부산에서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곧장 진주로 돌아와 손에 쥔 3,000원을 밑천삼아장사를해보자고결심했다.따 로 가게를구할 형편이못되어바깥 도로와면한 사랑채 앞마당을 활용하기로 하고 당장 제재소에서 나무를 구해 좌판을 제작했다. 볼품은 없지만 네식구의 생계가달린 소중한일터가그렇게 만들 어졌다. 아울러 그가 훗날 동명식품이라는 건실한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로서첫발을내딛는순간이었다. 간판도 없는 가게였지만,박재 동사장이장사에임하는마음만 큼은여느사업가못지않았다.소 자자의입장에서장사를하기시 작했다.1950년대중반이후미국 의잉여농산물을기반으로이른 바 ‘삼백산업’이라 불리는 제분 제장분야가 유망산업으로 떠오 르며 과자와 제빵, 제면, 청량음 료제조업등식품산업의성장을 견인하고있었다.이를간파한그 는 잠재 고객의 수요를 예측해 과자와 채소 등으로 판매품목을 선정하는 한편 저가 판매를 원칙 으로 하면서 2+1과 같이 이익을 극대화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질 좋은 물건을 싸게 파는 것인데 최근에 유행한 2+1 판매인 것이다. 그리고 신용을 최우선으로 삼았다.쌀장사에도 수완을 보였다.요 즈음농산물포장을할때밖에는좋은것으로안에는조금덜한것 으로 하다큰 망신살을받듯당시에도 쌀을판매하는분들이 속에 현미를 넣어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어 직접 소비자가 눈으로 확인 할수있도록하면서대박을친것이다.정직과신용은저울과같이 속일 수없다는 것을생활 철학으로 삼았기에사업은날로 번창하 였다. 집한칸을개조해출발했던장사는꾸준히번창했다.어떤품목 이든그것을가장잘팔수있는방법을찾아내정직하게판매한결 과였다.이후 진주시 상봉서동 1043-5번지에 대지면적357.02㎢(10 8평),건평91.8㎢(28평)의무지를마련하고건축에필요한자재를 부산에서 직접 구입해 직접 실어 날렸다.이후 2층으로 건물을 올 린 뒤 3층은 도로에 면한 쪽의 벽을 쌓아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건물안쪽에 살림집을 마련해 일곱 식구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단 돈 3,000원으로 장사에 뛰어들지 10여 년 만에 3층 건물을 갖게 된 그의감회는남다를수밖에없었다. 1층은 쌀과 잡곡,기타 식료품을 판매한 점포로 꾸미고 ‘동명상 회’라는간판을내걸었다.‘동명(東明)’이라는상호의동(東)은자 신의 이름자이기도 하고, 마침 건물의 입구가 동쪽으로 나있는데 서착안했다.명(明)은어린시절햇살을받아활짝핀지붕위박꽃 의밝은기운을담은글자였다. ‘동명상회’라는반듯한점포를 마련한뒤부터는취급 상품의종 류와 양을 대폭 늘렸다.그중에서도 국수는 들여놓기 무섭게 팔리 는품목이었다. 실제로국내국수생산량은1970년을 기점으로빠르게증가해1 971년에는약21만3천톤에이르렀다.국수의이같은인기는우리 나라 경제성장과 산업화 및 도시화의 진전에 따른 식품산업의 발 전,그리고식생활의변화에서비롯되었다. 1970년대초반까지만해도진주의국수공장은인사동의삼화국 수와 평안동의 영신국수 두 군데밖에 없어 국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거래하던 영신국수의 경우 밀려드는 수요를 충당하 지못해소매상들에게하루두상자씩만판매했다.따라서매일아 침 일찍 공장앞애 줄을 선 뒤에야 국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져온 국수는 매장에 들여놓을 새도 없이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모두팔려나갔다.‘국수하나만팔아도식구를굶기지는않겠구나’ 하는생각이절로났다. 그러던 어느여름 날여느 때처럼국수를사러간 그에게국소공 장사장은장마때문에국수를못뽑았다며난감해했다.순간그의 되리에는 동명상회 앞에 길게 줄을 서있을 고객들의 얼굴이 떠올 랐다.그는무슨일이라도할테니국수를가져갈수있게만해달라 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연바람에 의지해 국수를 건조시키던 시절 이었으므로 공장 측에서도 달리 손쓸 도리가 없었다. 결국 빈손으 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사장과의 속 깊은 대화를 통해 국 수공장의 운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날의 기억은 훗 날동명국수를창업하고동명식품으로키워내는밑거름이되었다. 동명상회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 아 진주 이현동의 국수공장이폐업을 앞두고기계와장비 일체를처분하려한 다는 소식이 들렸 다. 그 사이 진주의 국수공장이 13곳으 로늘어나면서치열 해진공장간경쟁을견디지못한 까닭이었다.그 무렵 국수공장에 관심을갖기시작한박재동회장 은 ‘이참에 국수를 직접 만들어 볼까?’하는생각이들었다. 하지만 막연한 바람만으로 공 장을 지을 수은 없없다. 그는 우 선 제면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면밀히검토해향후전망이밝다 는결론을내렸다. 공장설립을서두르면서‘동명 국수’를 회사명으로 ‘고끼리’를 상장으로 정했다.그 무렵 국내 유 중중인국수상표들은대구의소표,곰표를비롯해부산의노루표, 사자표,기린표등주로동물을이용한상표가많았다.그가코끼리 를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코끼리가 다식하는 동물로 온순하면서 도 신성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또한 코끼리처럼 공장 을크게키워보갰다는의지를담아내린결정이었다. 공장설립에필요한절차를마친그는1974녀3월1일자본금600 만원으로동명국수를창업하고진주지역의열네번째국수공장의 탄생을알렸다. 창업 이후 거듭된 시행착오는 최적의 제면 기술로 이어졌다.국 수는 밀가루,소금,물 이 세 가지 간단한 원료로 만들어지기 때문 에,맛을조절하는것이까다로운다른제품들보다제조과정이더 복잡합니다. 하지만 1984년, 일본에서 생산 포장설비를 도입하여 전 공정을 자동화함으로써 균일한 품질과 생산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그 이후 1996년부터는 전량 생산을 오뚜기에 공급하며,박 재동 회장의 노력은 설비투자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관리 시스 템으로이어졌다.이러한노력으로2000년에는ISO,KS A품질시 스템 인증을 획득하였으며,계속된 기술 개발 노력 덕분에 1997년 세면과2000년우동면을개발할수있었다. 1994년동명식품으로사명을변경한박재동회장은신규영업망 확보와생산품목다양화에힘을쏟았다.그러나그해매출은전년 대비34.1%감소한15억원대에머물렀고,당기순이익은무려95,1 %급감하는등기대에못미쳤다. 1993년흑자경영으로돌아서며희망에부풀었던그와직원들은 1995년을 맞아 심기일전을 다짐하며 생산과 영업에 매진했다. 그 러나상황은크게달라지지않았다. 동명식품이겪은경영악화는국내중소기업에공통적으로나타 난현상이었다.즉정부가추진한각종정책이근본적원인이었고, 뒤늦게 중소기업 지원에 대한 대책을 내세웠지만 실요성이 없었 다. 이 가운데박재동 회장이 주목한것은 국세청이 추진한‘중소사 업자 및 경영 애로기업 세정지원 종합대책’이었다.요건을 갖추었 던동명식품은경영애로기업세정지원이받아들여지면서한숨을 돌릴수있었지만문제가해결된것은아니었다.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무너지고 그 여파로 중소기업의 위기감 은최고조로높아있었다. 다행이도 차남 박철진 대리가 사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중소기 업진흥공단에서중소기업구조개선자금사업을운용한다는사실 을 알아내 공단측에 2억 5천 7백여만원을 신청했고, 이를 활용해 필요한 자동 시스템을 확충해 나가면서 불량률을 낮추고 직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나가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고 제품을 다양화 할수있었다. 1996년중소기업진흥공단의‘최고경영자경영혁신연수과정’을 이수한지얼마되지않아오뚜기OEM사담당자로부터전화한통 을받았다. 오뚜기는1986년외면받는전통식품을되살리겠다는생각아래 당면을 앞세워 븮옛날븯브랜드를 만들었고 1990년 제품군을 국수로 넓혔다. OEM방식으로 만들던 옛날국수는 판매량이 생산 물량을 앞지 를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옛날국수 OEM업체를 세 곳에서 더 늘리기로 한 오뚜기 제품 개발팀 눈에 들어온 곳이 동명식품이었 다.자동화설비를갖춘동시에고품질제품을만드는생산능력이 높은점수를받았다. OEM계약은동명식품에큰기회였다.자체상품생산을멈추고 오뚜기 옛날국수만 뽑기 시작한 동명식품은 체계적 회사로 거듭 났다.단순히 오뚜기라는 안정적 거래처를 확보한 데서 그치지 않 고 품질 관리법을 배웠다.완성품 상태만 보고 제품화를 결정했던 과거와 달리 숙성 온도·시간,반죽 정도 등 모든 국수 제조 공정을 살펴보면서 수치화, 계량화했다. 옛날국수가 추구하는 담백·구수 한 맛, 쫄깃쫄깃하면서 부드럽고 잘 퍼지지 않는 면발을 365일 일 정하게구현하기위해서다. 그 결과 1996년 16억6,700만 원이었던 동명식품 매출은 1998년 외환위기에굴하지않고37억원까지뛰면서안착했다. 박재동 회장은 20 04년 고향인 산청으 로회사를이전하면 서 제2의 도약을 이 루게 되었다. 그는 산청군금서면농공 단지에 5,500여 평 의 부지에 2,600여 평의공장을대한민 국 최대 규모로 건 설하게 되었다.동명 식품은경남진주에 서14번째로설립된국수회사이지만,박재동회장의노력으로200 4년에창립30년만에동명식품이라는이름으로대한민국최고수 준의국수시설을갖춘 이지역 유일한국수 제조업체로 탄생하였 다.그의 열정과 노력으로 매출액도 1997년의 23억 원에서 2000년 에는 46억 원,2010년에는 160억 원,그리고 2022년에는 200억 원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였다.박재동 회장은 이 모든 성과를 위해 50년 이라는세월을오직국수만을위해달려왔다. 박재동 회장은 삼천 원으로 시 작하여 10여 년 만에 3층 건물을 올렸다. 1층은 쌀 과 미곡 등 식료 품을 팔았고, 2층 에는 평소 문화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탁구장을 개설하 여 청년들의 심 각한 건강을 키 우는 장소로 활용하기를 바랐다.그러나 기대와 달리 탁구장은 불 량청소년들의 아지트로 변했고, 고민 끝에 독서실로 개조해 문을 열었으나 가방만 던져놓고 밖에서 보내는 것이다.항상 남을 위해 고 배려했던 어머니의 심성을 본받았기에 후진양성 즉 육영사업 을떨칠수가없었다.직원가족은물론어려운환경에놓인아이들 걱정이었다. 기회가주어질때마다장학금을전달했고,2022년부터(재)산청 군향토장학회이사장으로재임하며지난해장학금5000만원을기 탁하는 등 장학회 발전과 지역인재 양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 하고있다.그리고금년3월에는1억원을기탁했다. 박재동 회장은 뷺학생들이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 에 도시 아이들과 교육격차를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학 금을 기탁하게 됐다뷻며 뷺장학기금이 학생들을 위해 뜻 깊게 사용 되길바란다뷻고말한다. 그리고 종친회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가득했다. 고령의 나이 에도항상앞장서이끌었으며,산청군종친회관건립에도 수 억 원 을 기탁하는 등멈추지 않은열정은고령의 나이를무색하게만든 다.매행사마다항상부인주재순여사와함께하며아름다운동행 을 하고있어 박회장은만나는 사람들은먼저인자하고 자상하다 는 말은 한다. 특히 지난 11월 11일 창립 50주년 인사말에서 부채가 있는 사업 주는 집에 돌아가거든 골프채를 도끼로 부숴버려라 고 말해 경종 을울렸다. 이제박회장님은90을넘겼다.고령에도항상우리곁에있어주 시기를바라는마음뿐이다. 뱚종친탐방 동명식품박재동회장 동명식품창립50주년기념행사세리머니에서동명식품국수에대해한마디로정의한다면사회자의물음에박재동회장은 “우 리국수는입에넣으면서쫀 득하고부드럽고구수한맛이있다.이모든것이직원들의노력의결과”라며모든공을직원들에게돌리고있다.박회장의좌측 은박철진대표이다.박대표 는동명식품은‘나의꿈미래븯라고말했다. 박재동회장생애 박재동회장이부인주재순여사와함께201 9년 산청군종친회관에 세워진 공적비 제막 식에함께하고있다. 동명식품산청공장전경 박재동회장유년시절 단돈3,000원을밑천삼아장사에뛰어들다 남다른수완과고객과의신뢰를기반으로 동명상회개업식에서 국수하나만팔아도식구를굶기지는않겠구나 질좋은국수를만들어저렴하게팔아보자 1984년5월동명제면공업사준공식 동명식품 로고 코끼리, 코끼리처럼 공장을 크게 키워보갰다는 의지를 담았다. 품질관리와기술발전의역사 경영부진에서벗어나고자기울인다각적노력 박회장이자동화설비에대해소개하고있다. 오뚜기협력사로외환위기극복과새천년대비 뱚뱚뱚박재동회장의헌신과도약, 뱚뱚뱚대한민국최고수준의국수시설건설 2019년 창원시종친회원들을 안내하며 최고의 수 준최고의품질을자랑한다. 소비자에게받은사랑사회환원으로갚아나가 박재동 회장(右)이 지난 3월 아들 박철진 대표(左)와 함께 산청군향토장학회에 1억원의 장학금을 기탁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