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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30일 화요일 8 (제208호) 관향조 종친회 대규모 묘원조성으로 후손들의구심점역할을 하면서 지역은 물론 전 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 는죽산박씨임곡대종중 합동시향이 지난 15일 있었다. 이날제향은우천관계 로 아침 일찍부터 찾아 온 후손들은 우산을 받 치고 묘원을 찾아 성묘 한 후 영모재에 준비된 제상(祭床)앞에 질서정 연하게자리한가운데박형엽회장의집례로종중의원 로어른인고원현종이초헌관으로헌작하고이어홍종 종손, 금열 이사가 아헌과 종헌을 맡아 헌작했다. 그리 고본보상섭편집국장이축관으로독축하고승곤,홍렬 현종이좌집사와우집사를맡아제례를도왔다. 500여 년 전 광주 광산구 임곡에 입향 하여 후손들은 호남지역임곡을중심으로고창,화순등에산재하게되 게되면서묘소관리의문제가대두되고,좁은국토면적 에‘죽은사람이산사람의땅을차지해서는안된다.’는 뜻에서 자연회귀의 섭리에 따라 대규모 잔디묘원을 조 성하였다. 이 묘원은 2017년 착공하여 2018년 완공되었으며 현 재460여기의유해가안장되어후손들은매년봄양력4 월 15일 한자리에 모여 합동제사를 올림으로서 묘원은 종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뿐만아니라 대소사를 의논 하는등화합의장이되고있어화제(話題)다. 죽산박씨 임곡문중은 고려사 편수에 참여하고 형조 와이조판서를역임한문정공휘원정(元貞)의장자함 평현감공(휘승양)으로부터문호가열린다. 현감공의 아들 한곤(漢昆)은 현 감,장손자 배근(培 根)은 문과 첨지 , 차손자 양근(養根) 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충무위부 사직을 역임했다. 아들린( 멩 )은1513 년 문과에 급제하 여 홍문관 수찬에 있을 때 을사사화를 당하여 경성으로부터 광주로 내려 왔는데 광주 임곡에서 여생을 즐겼다. 휘 한곤의 면주 (面註)에 ‘함평 현감 재임 시에 경향을 왕래하던 중 나 주 박산이 좋은 터임을 알고 장자 배근을 주거케 하고 차자양근은원임곡에거주케하였다.’라는기록이전해 지고,가학정을비롯한종택,호남창의록등이뒷받침해 주고있다. 그리고 임곡에 세거지를 정한 후 지역의 토호세족인 행주기씨,광산김씨등과혼맥을잇고사계김장생선생 문하에서글을읽은후손이많아걸출한학자와효자충 신 등을 많이 배출하면서 입향이후 500여 년의 역사는 명문가로발돋움하는데손색이없다. 죽산박씨임곡대종중합동시향봉행 죽산박씨임곡대종중시향이지난15일우천으로인해영모재에서봉행된가운데참례한종인들이함께하고있다.사진앞줄제복입은제관 왼쪽부터승곤,고원,홍종,금열,홍렬順. 함평현감공과그후예460여위 후손들이묘원을찾아성묘하고영모재에제향을올렸다. 박고원초헌관이460여열선조신 위에대형잔으로헌작하고있다. 460여 位 밥과 국을 대형 합사용 제기에 올려정성을다하고있다.이제기는본보 에서 남원의 목기장인에게 의뢰하여 제 작했다. 밀양박씨규정공후참판공파정기총회및시향이지 난5일전북특별자치도완주군용진면상삼리관전마을 원모재에서있었다. 이날시향은전날부터오전까지내린비로인해원모 재에위패를봉안하고재균전회장의집례로참판공과 아드님충양공의신위앞에분정된참판공초헌관형상 (고흥),아헌관병우(경산),종헌관정수(고흥),충양공 초헌관 정수(경산), 아헌관 일균(부안), 종헌관 병목 (경산) 현종 등 제관이 각각 들어선 후 헌작하고 병식 (경산),진근(고흥)현종이각각독축한가운데엄숙봉 행되었다. 제향후가진정총에서는지난해결산보고등을원안 가결하고 추진중인 족보편찬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 줄 것을당부했다.참판공파파보편찬은현재자손록교정 작업과선현록화보및행장등의마지막작업이한창이 다. 종성회장의임기만료로병목전교수를후임회장으 로추대했다.참판공파는경산문중과고흥,부안문중이 상호협력하여화합과발전을이루고있는가운데회장 을윤번제로추대하고,회장과규정공파대의원을교차 로 맡고 있다.이에 직전 회장을 맡은 재균 회장은 규정 공파 대의원, 종성 회장은 고흥문중, 그리고 이제 경산 문중에서 회장을 추대하여 현 종성회장은 규정공파 대 의원으로직책을수행한다. (참판공)의 자는 돈지(惇之) 휘는 눌생(訥生) 호는 운수이며 시조왕의 49세손으로 규정공 휘 현(絃)이 고 조가 된다. 호조전서(戶曹典書) 휘 침의 3남으로 15세 부터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1409 년(조선 태종9년) 36세에 문과에 급제 훈련원판관(訓 練院判官)을 시작으로 두루 요직을 거쳐 세종 때에 훈 련원관사(訓練院 癩 事)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 으며 1449년(세종 31년) 8월 7일에 하세하니 향년 76세 였다.배위는중추부사허해의따님이다.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 煮 )는 충간 (忠簡)으로 고흥(高興) 숭양사(崇陽祠), 장흥 세덕사, 경산(慶山)율산서원(栗山書院)에배향(配享)되었다. 아들충양공(忠 웩公의)휘는경신으로자는자흠(子 欽)이고호는둔수(遯 쑴 )로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이 다.1414년(태종14)에 출생하여 1438년(세종20)25세에 등제(登第),경주판관(慶州判官),1453년(단종)훈련원 사직(訓練院司直)으로 재직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종 형 청재공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하여곧은마음과숨은절개는생육신과비유되었다.묘 소는 全州 東十二里 소양산 (韶陽山) 표동(瓢洞) 계좌 (癸坐)이나 실전 선고묘하(先考墓下) 설단(設檀)하였 다. 철종(哲宗), 병진(丙辰) 1866에 비로서 호조판서를 증직을 받고 충양의 시호 받았다. 경산의 율산서원(栗 山書院)배향되었다. 밀양박씨참판공파정총및시향봉행 참판공과아들충양공의시향이우천으로원모재에서엄숙봉행한후제관이한자리에모였다.사진앞줄왼쪽부터형상,병우,정수,병식정 수,일균,병목,재균순(順) 신임회장박병목전교수추대븣우천으로원모재에서 대원군의 서월 훼철령으로 시종 조인 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 과 고려 3대 시중공(휘 세통, 휘 홍 무,휘감)을배향한영덕영해의운 계서원이 폐철된 후 유지만 잔흔 (殘痕)을 남긴채 복원치 못하고 한 (恨)을 남기고 있던 중 다행이도 숭 조정신이 투철한 영두 당시 대종회 장이 선대의 방관(傍觀)과 무성(茂 盛)을개탄(慨歎)하고또조상에속 죄하는 단성(丹誠)으로 거액의 사 재를 단독 봉헌(奉獻)하여 건립된 경기양평의숭례사시향이지난14 일(일요일) 봉영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영해박씨대종회 성수 회장이 초헌관헌작후흥열축관이독축하 고 이어 회문, 은식 현종의 아헌과 종헌으로엄숙봉행되었다. 숭례사는 려조의 전법판서 삼중 대광벽상공신으로 자금어대(紫金 魚 謄 ;, 대궐에 출입하는 신분표지) 를 하사 받고 예원군(禮原君)에 책 봉된 휘 명천(命天), 위사공신 금자광록대 부 문하시중평장사 겸 상호군 판도판서 태자 태사를 지낸 휘 송비 (松庇),문하시중을 지 내고 통해군(通海君) 에 책봉된 휘 세통(世 通), 문하시중평장사 밀직사 겸 세자빈객령 을 지낸 휘 홍무(洪茂),문하시중평 장사 좌복야를 지내고 강양군(江陽 君)에 책봉된 휘 감, 병마단연판관 및운봉감부를지낸휘구(球),평양 서윤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휘 창령(昌齡),봉화현감을 지낸 휘 우(愚)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 다. 영해박씨 문중은 이곳 숭례사를 비롯 철원의 구은사, 보은의 천인 사, 지평문중의 영지사, 안동의 돈 옹공 시제, 김화의 서윤공 시제 등 에 종파를 초월하여 대거 참례하면 서숭조와애종을함께실천하고있 어타문중의귀감이되고있다. /자료제공박노정영해박씨대종회상임 부회장 영해박씨3대(代)문하시중과그후예 시향봉행 경기양평숭례사 숭례사제관,왼쪽부터박성수초헌관,박회문아헌관,박은식종헌관,박봉영집례,박흥열축 관순(順) 제향광경,독축 밀성박씨 진주 통사랑 공 종중(회 장 동상)은 지난 6일 경 남 진주시 문산읍 이곡 리 113 호산 재(虎山齋) 정당에 121 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고유와 함께 첫 합동제례 를봉행했다. 이번 위패봉안은 통사랑공 후예 7지파별 제향을 각각 달리 봉행하 면서 후손들의 단합의지를 보여주 지못하고세속의변화에맞추지못 한다는 지적에 지난해부터 준비하 여한곳에봉안하여합동제사를올 림으로서 호산재는 종중 후예들의 구심점역할을할수있을것으로기 대하고있다. 위패는 위서위상(以西爲上)으로 상층부터 좌에서 우로선대조 16위, 묵(默)자, 재(在)자 항렬까지 42위 를 7지파 순서대로 봉안하였고, 그 아래는 현(鉉)자, 순(淳), 상(相)자 할렬까지종원봉사자신청위패63 위를지파별로봉안했다. 그리고 위패 후면에는 위패 봉안 순서와 후손 봉사자와의 관계를 기 록하고봉사자이름뒤에대수를기 록(6대조, 5대조, 고조부모, 증조부 모,조부모,부모등)했다. 호산재(虎山齋)는 밀성박씨 송 은공 휘 익(翊)의 장자 우당공(휘 융)의 10世 통사랑 박동창(朴東昌) 을 비롯한 이하 선세(先世) 재실이 다. 1960년 후손들의 성력(誠力)으 로정면4칸측면1칸의팔짝지붕와 가로왼쪽2칸의방과오른쪽1칸의 방 그리고 가운데 대청에 제상(祭 床)이 있어 매년 가을 시향을 받들 고있다. 재실을감싸고있는뒷산은큰호 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국으 로 재사(齋舍)이름 또한 이에 기인 한듯하다. 통사랑공은 청도군 이서면 수야 리에서 출생하여 20세가 되던 1627 년 정묘년에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 인세력들은 친명배금정책을 내세 웠다. 이에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3만명의 병력으로 조 선을 침공하였고, 파죽지세로 남하 하여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 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화로 소현세 자는전주로피난하게된다. 이때 통사랑공 또한 청도를 떠나 지리산(덕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 0년후이곡마을로이거하였다. 난이 평정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 가지 않고 이곡에서 돌아가시니 아 마도 마을 밖으로 나가면 못산다는 전설 때문인가 여겨진 가운데 자손 들은 장례(葬禮) 후 묘 소를 살피고 효를 행하며 농사를 본업으로 삼아 세거하게 됨으로써 400여년 집성촌 이 되었다. 밀성박씨진주통사랑공종중호산재121위 (位)위패봉안 통사랑공종중은호산재에선조121위의위패를봉안하고지난6일고유제를봉행하고이후 합동시향을봉행했다. 후손들의구심점역할할듯 박동상회장 송은박익선생과그의아들아당 (諱 調), 졸당(諱 聰) 선생을 모신 산청의 신계서원 춘향이 음력 3월 중정(中丁)일인 지난 23일 정충사 에서 지역 유림주관으로 엄숙 봉행 되었다. 이른아침유림들은각자손에유 복을 담은 가방을 들고 신계서원을 찾아 오랜만에 만난 유림들과 반갑 게 인사한 후 정태근·정옥영 원임 (院任)의 안내로 강당에서 개좌를 열고제관을분정한후정충사로옮 겨 정인식(鄭寅植, 산청) 유학자의 집례로 초헌관 김종선(金鍾善, 진 주),아헌관 허두천(許斗 , 진주), 종헌관 이봉호(李鳳鎬,산청),축관 정상화(鄭相和, 丹溪) 유학자가 각 각제관을맡아진행했다. 신계서원은 신계서원(新溪書院) 은 1836년(丙申 헌종2)에 시공(始 工)하여 1869년(己亥)에 工役)을 마쳤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사(貞忠祠)에 송은 박익선생 을 주벽으로 영정(影幀)을 봉안하 고 아당(啞堂),졸당(拙堂)두 분의 아드님을 배행하여 춘(春) 3월 추 (秋) 9월 중정(中丁)에 유림에서 봉 향(奉享)하였다. 1868년(고종5 무진(戊辰))에 조 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 되어응봉산중턱현위치에영정각 (影幀閣) 3칸과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여 송은선생의 영정을 봉안 하고 후손들이 춘추로 향화(香火) 를 받들었으며 학당(學堂)으로 이 어졌다. 1985년(乙丑) 3월 채례시 (菜禮時)에 유림들이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공의(公儀)가 있은 뒤 후손들이그일을맡았고,유림들이 도와 經營하니 사우3칸과 내삼문 그리고대문3칸을중건하고주위를 정화했으며 제기 18점이 지방문화 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지자체에서 문화재 보호각(東齋)3칸을 중건하 였으며 원우(院宇)를 번와하고 보 수하고, 1989년 3월 11일 복설하였 다. 충숙공 송은 박선생(忠肅公松隱 朴先生)의 휘는 익(翊 : 1332~1398) 이며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 (松隱)이다. 공민조에 급제하여 사 재소감, 예부시랑, 중서령, 예판 등 벼슬을했다.이성계와 같이남정북 벌을했다.그러나려말국정이쇠퇴 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곳은, 이목 은, 길야은 등 여러 선비들과 시국 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 기고토론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나 불러 좌우정을 제수하 려고해도끝내나가지않았다.이들 은 세칭 8은이라 했다. 시호는 충숙 (忠肅)이며 두문동 72현으로 경기 도파주의고려통일재전에고려충 절신으로 배향되었고, 그 외 밀양 덕남사청도용강서원,산청신계서 원, 창원 운암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경남 밀양시고법리소재송은선생고분 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국가 문화재 사적제459호로지정되었다. 산청신계서원춘향봉행 지역유림주관 송은박익선생과두아드님학덕기려 신계서원의제의(祭儀)는엄격하다이날제례에도합천향교홍제전교,진주향교종식원임 전교등이함께했다.